“조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의 수도 ○○입니다.”

60, 70년대 군사정권 당시 외국에서 한국대표팀 또는 선수가 스포츠경기를 시작할 때 TV나 라디오를 통해 카랑카랑하게 흘러나오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매양 이랬다. ‘축구팬 여러분’ 또는 ‘복싱팬 여러분’ 정도면 적당했을 텐데 캐스터역을 맡은 아나운서들 입에서는 으레 ‘국민’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스포츠가 국뽕의 소재로 기능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과거 군사정권들은 스포츠에 대한 국가적 지원에 활수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가 엘리트 스포츠에 유독 집착하게 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스포츠를 통해 형성되는 국민 감동과 단결심, 애국심은 정권의 정통성 결핍을 보완해주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스포츠가 우민화 도구로 악용된다는 비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끊임없이 제기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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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AP/연합뉴스]

88서울올림픽 또한 그 연장선에서 유치된 국제스포츠행사였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생활문화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준 대회였지만 그 이면엔 국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언젠가 이 난에서 언급했듯이 애국심은 양가적 성격을 띠는 정서다. 안으로는 단합을 지향하지만, 밖으로는 배타성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합리와 균형이 담보되느냐 하는 점이다. 부작용은 애국심이 국뽕으로 변질될 때 발생한다. 맹목적인 애국심, 국수주의 등이 그 결과물들이다. 그 원천의 하나인 국뽕 스포츠의 잔재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다.

이를 입증해준 것이 2020도쿄올림픽 진행 과정에서 MBC-TV가 보여준 일련의 행태들이다. 그 중 하나가 축구 조별리그 B조 한국-루마니아 경기 과정에서 나온 자막 사건이었다. MBC는 전·후반 경기 사이 시간에 ‘고마워요, 마린’이란 자막을 내보냈다. 자책골 기록으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을 상대 선수를 한 나라의 공영방송이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부끄러운 모습이 전파를 타고 공개된 것이다.

MBC는 이번 올림픽 개막식을 중계하면서도 몇몇 참가국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사진이나 멘트를 내보내 비난을 샀다. MBC의 몰상식한 행태는 또 있었다. 지난 26일 있었던 남자 유도 경기 때 재일동포 선수가 동메달을 따자 캐스터는 “우리가 원했던 색깔의 메달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일로도 MBC는 숱한 비난을 받았다.

올림픽을 국가 간 세 대결의 장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은 메달 수 기반의 국가 순위에 대한 집착에서도 잘 나타난다. 순위를 중시하는 분위기 탓에 우리 언론들은 금메달 수를 기준으로 한 나라별 성적의 서열화를 당연시한다. 금메달 수가 같을 경우엔 은메달 수로, 은메달 수도 같을 경우엔 동메달 수로 다시 순위를 가르는 기막힌 방식까지 개발해냈다. 이 방식은 금메달 하나가 은메달 수십 수백 개보다 낫고, 은메달 하나는 동메달 수십 수백 개보다 낫다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는 서방 언론에서는 보기 힘든 보도 행태다. AP 등 주요 외신들은 올림픽 기간 중 엄청난 물량의 경기기사를 내보내지만 국가 순위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국가별 메달 획득 현황을 보도할 경우엔 금메달 수가 아니라 전체 메달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게 보통이다. 메달 색깔의 차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순위에 대한 우리의 유별난 집착은 이번 올림픽 축구 스케줄 보도를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조별리그 통과를 확정하자 우리 언론들은 일제히 ‘8강 진출’이란 표현을 썼다. 하지만 ‘8강’이나 ‘4강’은 국제스포츠계에 존재하지 않는 용어다. 축구 조별리그를 통과한 경우 주최 측이나 외신들은 ‘쿼터 파이널’(준준결승), ‘세컨드 라운드’(2회전) 또는 ‘토너먼트’에 진출했다는 표현을 쓴다. 32개국 대표팀이 출전하기 때문에 올림픽축구보다 진출 단계가 하나 더 있는 월드컵축구대회도 마찬가지다. 단계별로 조별리그, 세컨드 라운드, 쿼터 파이널. 세미 파이널, 파이널 등등의 단계가 존재할 뿐이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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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화 선호 및 유별난 일등주의의 배경엔 국뽕 스포츠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국뽕 스포츠가 풍미하던 시절 외국팀을 만난 선수들은 무조건 이겨야 했고, 그래서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매개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올림픽 게임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 대항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올림픽헌장에도 명기돼 있다. 헌장 1장 6조 1항은 ‘올림픽대회의 경기는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닌 개인전 또는 단체전을 통한 선수들 간의 경쟁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올림픽이 국가 개최가 아니라 도시 개최 형식으로 치러지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도 일본올림픽이 아닌 도쿄올림픽이다. 올림픽헌장 이념에 따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메달 수에 의한 국가 서열화를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당연히 IOC 차원의 국가 종합순위 집계도 없다.

다만, 현실 속에서의 올림픽은 어느 정도 국가 대항전 성격을 띠고 있는 게 사실이다. 냉전시대 때엔 올림픽이 미국·소련 간 국력 대결의 장으로 변질되기도 했었다. 특히 공산권 국가나 패전한 전범국들은 올림픽을 국민단합, 애국심 자극의 도구로 활용하는데 더 적극적이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해묵은 과거사가 돼버렸다. 국뽕 올림픽은 내세울 만한 게 못되는 구시대의 유물이자 후진적 정서의 흉물스러운 잔해다. 하기야 국뽕 올림픽은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선진 국가들과는 진작부터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한동안 미몽에 사로잡혀 있었을망정 이젠 우리도 국뽕 올림픽의 잔재를 훌훌 털어내야 할 때가 됐다. 그래야 공정한 과정을 거쳐 정의롭게 나타나는 결과에 경의를 표하고, 아름다운 패배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올바른 관전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이 먼저 변해야 한다. 건전한 올림픽 관전문화를 선도하기는커녕 시민의식 수준도 못 따라가는 언론이라면 스스로 존재가치를 물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개화된 시대에 국뽕 올림픽 놀음은 가당찮은 일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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