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에 일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이 갈수록 둔화되고 생산과 투자, 고용이 장기간 동반 부진에 빠지자 정부가 경제정책 추진 과정에서 보다 유연한 자세를 취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기류는 지난 3일 발표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통해 일부 드러났다. 하루 뒤인 4일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하반기 정책방향을 주제로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눈 자리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홍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신성장 연구개발(R&D) 세액공제 인정 범위의 확대 요구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50인 이상 300인 미만 기업에 대해서는 주 52시간제를 보완해 적용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했다. 해당 기업에 대한 주 52시간제 적용은 당장 내년부터 시작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사진 = 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사진 = 연합뉴스]

앞서 정부가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은 우리 경제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부실한 경로로 가고 있음을 전제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날 정부는 6개월 전에 스스로 제시했던 성장률 전망치를 0.2%포인트 낮췄다. 새로 제시된 전망치는 2.4~2.5%다. 하지만 이마저 달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이 수치엔 정책효과에 대한 기대가 배어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홍 부총리는 4일 CBS라디오 프로그램 ‘김현정의 뉴스쇼’와 가진 인터뷰에서 “추경 효과나 하반기 경제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나타날 정책효과를 (전망치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곧 정책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 경우 성장률이 그 아래로 더 내려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낮춰진 성장률 전망치마저 정부의 희망사항에 불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에 이르는 동안 “연말이면 나아질 것”이라며 ‘상저하고’를 운위했던 정부가 이 정도로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인정한 것도 전에 없던 일이다.

이 같은 시각을 토대로 정부가 제시한 하반기 경제정책 청사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업들에 대한 세 부담 경감 방안이다. 그 대상에 대기업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 특히 새롭게 부각됐다. 이는 그 동안 문재인 정부가 펼쳐온 대기업 증세정책과 상반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법인세 최고세율을 25%로 끌어올렸다. 이는 기업소득 3000억원 초과 구간을 신설함으로써 이뤄졌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법인세 최고세율을 두자릿수나 낮춘 것과 대조되는 조치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2019년 현재 법인세 최고세율(지방세분 포함)은 한국 27.5%, 미국 25.9%다. OECD 회원국 평균 법인세 최고세율은 23.5%로 집계돼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정부가 하반기 청사진에서 밝힌 기업 감세정책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정부가 강조한 대로 소위 ‘민간투자 촉진 세제 3종세트’가 그것이다.

그중 첫째는 생산성 향상 시설 투자세액 공제율의 한시적 상향조정이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중소기업에 각각 1, 3, 7%씩 적용하던 공제율을 법률 개정안 통과 이후 1년 동안 2, 5, 10%로 각각 높인다는 것이 골자다.

대기업에 고작 1%포인트 공제율을 높여주기로 한 것을 두고 ‘생색내기용’이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현 정부가 대기업 감세 카드를 내밀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조치가 시행되면 대기업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1000억원을 투자할 경우 기존보다 10억원 많은 20억원의 세액공제를 받는다.

올해 말 일몰되는 생산성 향상, 안전시설 투자세액 공제 제도에 대한 연장 조치도 취해진다. 새로 설정된 기한은 2021년이다. 적용 대상도 확대됐다. 추가된 대상으로는 의약품 제조 첨단 시설, 위험물 시설 등이 있다.

기업의 법인세를 실질적으로 줄여주는 효과를 내는 가속상각 제도도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확대 실시된다. 대기업의 생산성 향상 시설, 에너지 절약 시설에 대해서도 50%까지 가속상각을 허용한다. 가속상각이란 새로운 시설이나 장비에 대해 초창기에 더 많이 감가상각이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비용으로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10억원짜리 장비의 내용 연수가 10년이라면 사업주는 매년 1억원을 감가상각비로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50%로 가속상각을 하면 내용 연한이 5년으로 간주돼 매년 2억원을 감가상각비로 처리할 수 있다. 이는 초창기에 비용이 많이 들어간 것으로 회계처리를 함으로써 투자비용을 조기에 회수하도록 돕는 작용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명목 법인세 총액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방점은 투자비용 조기 회수에 찍혀 있다.

이상에서 보듯 ‘세제 3종 세트’는 기업의 투자 촉진을 위해 마련됐다. 그만큼 국내 투자가 날로 부진해지고 있음을 의식한 조치다. 한국은행 집계에 의하면, 올해 1분기 국내 설비투자는 전년 동기에 비해 17.4%나 줄었다. 이는 금융위기 여파가 맹위를 떨쳤던 2009년 1분기(-19.0%)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반면 우리 기업들의 해외 투자는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기업 중에서도 제조기업의 탈(脫)한국은 우리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시장 개척이 주된 이유라 하더라도 제조기업들의 한국 이탈 가속화는 국내의 투자 환경이 그만큼 열악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서 또 하나 주목할 내용은 이미 계획돼 있으나 진척이 느린 각종 시설 건립 사업을 가속화하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경기도 화성 복합테마파크 인허가, 서울 양재동 양곡도매시장 부지의 R&D 캠퍼스 조성, 수도권 기반의 마이스(MICE: Meeting, Incentive trip, Convention, Exhibition&Event) 시설 건립 등이 그 대상들이다.

홍 부총리는 새로 발표된 경제정책 방향과 관련, “어려운 상황을 딛고 우리 경제가 재도약하려면 민간 투자와 수출이 회복돼야 한다”고 강조한 뒤 “약 10조원 규모의 대규모 민간 투자가 진행되고 있지만 행정 절차나 규제로 멈춰서 있는 것이 있다. 그 걸림돌을 정부가 앞장서서 하반기엔 모두 해소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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