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재정증권 발행 누적액이 올해 들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 재정을 관리하는 기획재정부에 의하면 올해 재정증권 누적 발행액은 관련 집계자료 확인이 가능한 2011년 이후 최고수준인 49조원에 달했다.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또 다시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반면 정부는 재정증권 발행이 재정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라는 논리로 비판을 일축하고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각자의 논리가 다른데서 알 수 있듯이 재정증권 발행이 주는 효과는 양면적이다. 하지만 종합평가를 하자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할 경우 경제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전문가들의 대체적 의견도 이와 같다.

재정증권을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재정증권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발행 이유와 운용 효과는 무엇인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재정증권은 흔히 ‘정부의 마이너스 통장’으로 불린다. 이는 정부가 재정 운용 과정에서 급전이 필요할 경우 발행하는 단기 유가증권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별칭이다. 단기 유가증권인 만큼 재정증권은 반드시 그 해에 돈을 지불하고 회수해야 하는 대상이다. 28일물 또는 63일물로 발행되는 게 보통이다. 국고채가 일반적으로 3년물 또는 10년물 등으로 발행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채권은 상환 기간이 짧을수록 금리가 높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높은 이자를 지불해가며 단기 유가증권인 재정증권을 발행하는 것일까? 그 필요성은 정부가 국고금 출납 과정에서 생기는 일시적 자금 부족 현상에서 비롯된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세 수입을 통해 재정을 충당하는데 세목에 따라 국고에 돈이 들어오는 시점에 차이가 생긴다. 그 같은 시차로 인해 생기는 세수의 분절성을 극복하기 위해 발행하는 것이 재정증권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당장 재정 지출이 꼭 필요한데 특정 세목의 세수가 확보되려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경우 재정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이자로 지불하는 비용보다 재정의 적시 사용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정부가 재정증권의 발행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리도 이와 같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정부의 재정 조기집행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표출됐다. 대외적 경제 여건이 악화되고 덩달아 수출과 투자가 부진해지면서 경기의 활력이 떨어진 것이 그 배경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정부가 재정의 조기집행에 박차를 가한 결과 올해 상반기의 예산 집행률은 사상 최고치인 65.4%를 기록했다. 1년간 쓸 전체 예산을 상반기에 집중적으로 집행했다는 뜻이다. 이는 당초 정부가 목표로 설정한 집행률 61%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올해엔 유달리 수입과 지출의 미스매치가 크게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올해 상반기엔 세수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조원이나 줄었고 세수 진도율(상반기까지 걷힌 세수 비율)도 지난해보다 0.5%포인트 낮은 53.0%에 그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급전 마련을 위해 재정증권 발행 액수를 늘리게 된 것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그 결과 정부는 올해 2월부터 9월까지 다달이 2조, 10조, 7조, 6조, 10조, 3조, 4조, 3조원 등의 재정증권을 발행하게 됐다. 특히 7~9월에 발행된 재정증권으로 조달된 자금은 전액 기존의 급전 빚을 갚는데 사용했다. 급전을 내 급전 빚을 갚는, 일종의 돌려막기를 행한 꼴이다.

이렇게 해서 올해 들어 쌓인 재정증권 발행 누적액이 역대급인 49조원에 이른 것이다. 지난해까지 집계된 연간 누적 재정증권 발행액의 최고 수준은 2014년과 그 이듬해에 기록된 38조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정권이 매년 발행된 것은 아니었다. 지출 대비 세수가 넉넉했던 2007~2008년과 한국은행 차입으로 재정 부족을 충당했던 2009~2010년엔 발행 사례가 전혀 없었다. 이듬해인 2011년 정부는 모처럼 재정증권을 발행했지만 누적 액수는 11조원에 불과했다.

이상에서 보듯 해마다의 재정증권 발행 규모는 세수 상황에 따라, 혹은 정부의 재정운용 적극성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양상을 보여왔다. 경우에 따라 불가피할 수도 있고,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한 처방의 일환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듯 지나치면 아니 함만 못 하듯 재정증권 발행 역시 적정한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재정증권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질 경우 각종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다.

재정증권 남발이 가져다줄 대표적 부작용은 시중 유동성의 압박이다. 정부의 재정증권 과다 발행은 중앙은행이 자산축소(채권 공급 확대)를 통해 시중 자금을 흡입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는 미국의 연방준비제도가 과거에 한동안 채권 회수를 통해 시중에 돈을 대거 풀었던 것(양적완화)과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 조치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재정증권의 과도한 발행은 민간의 자금 사정을 악화하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심할 경우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무력화시키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이는 재정증권 남발이 자칫 민간 부문을 구축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중요한 이유다. 민간 부문 구축의 구체적 사례로는 소비와 투자의 위축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경제 전문가들은 재정증권 발행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리 가능한 범위에서 계획적으로 진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다시 한 번 역대급 재정증권 발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 스스로도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상되는 세수 감소다. 정부는 내년도 세입이 올해보다 0.9% 정도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전망이 맞아떨어진다면 내년에도 올해 수준의 재정증권 발행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