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결국 긴급재난지원금을 전국민에게 지급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집요한 압박에 밀려 기존의 방침을 바꾼 모양새가 됐다. 정부·여당이 새롭게 합의해 제시한 안은 전국민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되 고소득자들의 경우 알아서 수령을 사양해 달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름하여 ‘자발적 기부’를 해달라는 것이다. 지원금을 사양하면 세액공제를 통해 소득세를 일부 감면해주겠다는 내용도 새로 포함됐다. 고소득자들의 ‘선처’에 기댄 사실상의 전국민 지급안을 내놓은 셈이다.

이로써 긴급재난지원금은 긴급성도 재난지원 성격도 거의 희석된 채 정치적 결정의 산물로만 남게 됐다. 긴급성은 지급 시점이 마냥 늦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재난지원성은 전국민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보는 게 옳다. 애초에 감염병 사태로 하루하루가 막막해진 이들을 서둘러 돕자는 취지에서 구상됐음을 감안하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4일 국회에서 2차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김재원 국회 예산결산위원장(왼쪽)과 구윤철 기획재정부 차관. [사진 = 연합뉴스]
24일 국회에서 2차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김재원 국회 예산결산위원장(왼쪽)과 구윤철 기획재정부 차관. [사진 = 연합뉴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지금도 언제쯤에나 지급이 이뤄질지 모를 판이다.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은 방침 전환의 근거를 따져 물으며 여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통합당의 이의 제기를 발목잡기로만 몰아붙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긴 시간에 걸쳐 극심한 내분을 일으켰을 정도로 논쟁적 성격을 지닌 의제를 야당에게 즉각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사실 재난지원금 지급 방안은 당·정·청 논의 출발 시점부터 불순한 의도를 드러냈다. 최초 기획 단계에서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정부의 50% 지급안을 여당이 거부한 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만약 처음 정부안대로 소득 하위 50% 지급 방안이 반영된 추가경정예산안을 국회로 넘겨 논의가 이뤄졌다면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초의 정부안에는 재정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소득 하위 50%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복지의 기본원리에 충실하다고 평가받을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당의 요구를 정부가 일부 수용하면서 소득 하위 70% 지급 방안이라는 괴물이 탄생했다. 소득 하위 70% 기준은 우리 정부가 단 한 번도 활용해본 적이 없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경계선이었다. 이를 가시화시키려 하니 당연히 혼란이 일어났고, 가상의 경계선을 사이에 둔 대립구도가 형성될 기미까지 나타났다. 수혜 대상을 최대한 늘리거나 여당에 보다 유리한 7대 3 대립구도를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예정된 부작용이었다.

그나마 어렵사리 결정된 소득 하위 70% 지급안마저 여당의 선거 유세 과정에서 일찌감치 전국민 지급안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 때부터 긴급재난지원 방침은 사실상 선심성 퍼주기용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를 제1 야당이 ‘닥치고 수용’하리라 생각했다면 오만도 그런 오만이 없다 할 것이다.

현재 통합당은 △총액 규모 △예상되는 적자국채 발행 규모 △국가가 기부금을 받을 수 있는지 여부 △예상되는 기부금 규모 △회계처리상 문제는 없는지 여부 △재난지원금 수혜 주체와 납세 주체의 불일치 문제 해소 방안 등을 묻고 있다. 하나하나 설득력을 갖춘 물음들이고 이중엔 정부 당국이 애초에 전국민 지급안에 반대하며 제기했던 의문도 일부 포함돼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통합당의 문제 제기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방안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여당의 유력자들이 총선 유세 과정에서 쏟아낸 약속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부터가 잘못됐다. 내용이라도 좋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어느 모로 보나 이번에 정부·여당이 새롭게 제시한 전국민 지급방안은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

기부 방식과 그 법적 근거 마련 등 여러 기술적인 문제를 논외로 치더라도 이번 방안은 많은 부작용을 예고하고 있다. 당장 기부금 액수가 얼마나 될지도 모른 채 감으로 예산을 운용하려 한다는 지적을 들어 마땅하다. 예산 편성시 수입과 지출이 통계자료들을 토대로 정교하게 제시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진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얘기다.

울며 겨자 먹기로 기부 대열에 동참하는 이들이 양산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말로는 자발적 기부라지만 벌써부터 정부·여당이 100만 공무원들의 자의반 타의반 참여를 기대하고 일을 벌인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제2의 금 모으기니 국채보상운동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부터가 공무원들에게는 예사롭게 느껴질 수 없는 탓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은 이제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어차피 지급 시점도 예상보다 늦춰지게 됐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국회가 명분과 효율성을 살리고 가능한 한 국가재정에도 부담을 주지 않는 방안을 찾도록 해야 한다. 애초 기획재정부가 제시한 소득 하위 50% 지급안도 현실적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공리성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은 채 여당이 유권자들에게 즉석식 약속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 재정 운용이 좌우되어서는 곤란하다. 한 집안의 가계 살림살이도 그런 식으로 마구 꾸려지지는 않는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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