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정부가 시장 상황을 무시한 채 오르기만 하는 우윳값을 잡겠다며 구체적 행보에 나섰다. 그간 국내 우윳값은 수요공급 원칙을 비웃으며 상승행진을 이어왔다. 그 결과 서민들로서는 대표적인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인 우유조차 마음대로 사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내 우윳값은 소비가 현저히 감소해가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상승 행진을 거듭해왔다. 소비가 줄면 값이 내려간다는 경제학의 기본원리가 우유 소비시장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 배경엔 독특한 원유(原乳: 젖소에서 짜낸 그대로의 미가공 우유) 가격 결정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격 결정이 생산자 주도로 이뤄지는데다, 그 방식마저 생산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생산비 연동제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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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원유 가격을 결정하는 곳은 낙농진흥회다. 15명의 이사로 구성된 진흥회엔 낙농업계와 정부, 소비자 측을 대표하는 이들이 고루 참여한다. 하지만 생산자 측을 대변하는 인사가 7명에 달해 그들의 입김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정적 문제는 생산자 측 인사들이 집단으로 회의에 불참할 경우 정족수(3분의 2 참석) 요건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현재 원유 가격은 생산비와 연동돼 있다. 생산비가 올라가면 우유 수요가 많든 적든 공급이 넘치든 모자라든 상관없이 원유 가격이 올라가도록 돼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내 우유 소비는 꾸준히 줄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출산율 저하에 더해 코로나19 대유행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학교 급식용 소비마저 감소했다. 그 결과 우유 재고량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올해 2월 기준 우유(분유 형태) 재고량은 1만2109t을 기록했다. 2016년 9월(1만2609t)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재고가 늘어가는 상황이지만 낙농업계는 최근 유가공업체들에 원유 가격을 ℓ당 947원으로 21원(2.2%) 인상한다고 통보했다. 그 결과 유가공업체들은 이달 전반기의 원유대금을 인상된 가격으로 치러야 한다. 대금 정산이 통상 보름마다 한 번씩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번의 원유가 인상 과정에서 낙농진흥회는 정부의 유예 요구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합리해 보이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배경엔 앞서 언급한대로 독특한 원유 가격 결정 체계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체계가 정착된 데는 나름의 과정이 있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2000년대 들어 낙농가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구제역 빈발이었다. 이에 박근혜 정부가 낙농업 붕괴를 막기 위해 지금의 원유 가격 결정 체계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원유 공급가를 둘러싸고 자주 발생했던 낙농가와 유가공업체 간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었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국내 원유 가격 추이는 외국의 그것과도 차이를 보였다. 지난 20년 간 국내 원유 가격은 72.2%나 상승했다. 같은 기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의 인상률이 각각 19.6%와 11.8%였던 것에 비하면 그 폭이 매우 크다. 뉴질랜드에서는 최근 10년간 원유 가격이 4.1% 하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유 가격 인상은 일반 우윳값 인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유가공업체들도 조만간 나름대로의 우윳값 인상폭을 정해 가격 조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파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유를 재료로 하는 빵과 생크림, 치즈, 버터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식품들의 가격이 줄줄이 올라갈 것이 확실시된다.

지금의 원유가 결정 제도는 낙농가의 생산원가 절감 노력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문제를 안고 있다. 우유가 남아도는데도 소비자들이 우윳값 인상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낙농가들이 아쉬움을 느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제도 개선을 위한 정부의 구체적 움직임은 25일 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낙농산업 발전위원회’ 1차 회의를 통해 가시화됐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위원회를 통해 낙농산업의 중장기 발전 방안과 원유가격 결정 체계 개선안 등을 마련한 뒤 올해 안에 최종안을 확정하기로 했다.

이후의 원유 가격 결정구조 개선 등은 낙농진흥법 개정 등의 과정을 거쳐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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