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최진우 기자] 정부 예산 운용의 총책임자가 새해 예산을 집행하는 첫날부터 추가경정예산을 입에 올렸다. 애써 1년치 살림계획을 짜서 얼마 전 국회에 제출했고, 국회도 숙의 끝에 새해 예산안을 막 승인했는데 집행 첫날부터 정부 스스로 그 예산안에 문제가 있다고 시인하는 모양새가 연출된 것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새해 첫 업무가 시작된 3일 정부세종청사로 출근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방역 진행상황과 소상공인 피해, 추가 지원 필요성, 재정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판단해서 추가경정예산 편성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추경 편성은 없을 듯 이야기해오더니 슬쩍 방향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발언 취지상 추경 편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뜻을 밝혔다고 볼 수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러면서도 예산 집행 첫날부터 그런 뜻을 밝히는 게 민망했던지 홍 부총리는 “오늘은 607조원 규모의 2022년도 본예산을 집행하는 첫날”이라고 먼저 밝혔다. 이어 “예산 집행 첫날부터 추경 여부를 논하는 게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홍 부총리가 이날 추경 편성 추진에 대해 확정적 답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차적으로는 소상공인 관련 예산을 1분기에 최대한 집중적으로 집행하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일단 기정예산 중 코로나19 관련 예산을 최대한 앞당겨 집행하되 여의치 않으면 추경을 편성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차적으로는”이란 전제를 깔아둠으로써 언제든 방향 전환을 시도하더라도 거짓말 논란에서 빠져나갈 틈을 마련해둔 셈이다.

지금까지 홍 부총리가 보여온 행동 패턴도 정부의 조기 추경 편성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홍 부총리는 그간 수도 없이 재정 운용과 관련한 여당의 압박에 버티는 듯하다가 막판에 물러서는 모양새를 연출해왔다. ‘나는 반대했다’는 기록만 남겨둔 채 사실상 백기투항하는 모습을 보인 경우도 있었다.

홍 부총리는 이번에도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난달 20일 경제정책방향을 브리핑하면서 “현 단계에서 추경 편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더니 해가 바뀌자 여건을 따져가며 추경 편성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슬그머니 물러서는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의 입장 전환 조짐은 김부겸 총리의 발언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감지됐다. 김 총리는 최근 방송 출연을 통해 추경 편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선심성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국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국회가 요구하면 추경 편성에 응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쳤다고 볼 여지를 남긴 발언이었다.

정황상 새해 예산안 조기 편성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듯 보인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00만원의 소상공인 방역지원금과 500만원의 손실보상금 선지급을 유도한 가운데 2월 임시국회 회기 내 추경 통과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점이 일차적인 배경이다.

표심을 노리는 여당의 추경 추진 의지는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당 소속 의원 83명은 3일 코로나 손실 보상 및 지원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100조원 규모의 추경 편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 의원이 내세운 추경 편성의 구체적 이유는 ▲영업 손실에 대한 온전한 보상 ▲고정비 상환 감면 대출제 도입 ▲부실채권 매입 ▲특수고용노동자 등 취약계층 지원 ▲소상공인 전용 소비쿠폰 발행 등이었다.

내용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민주당 지지층 지원을 위해 100조원이란 재원을 추가로 마련하겠다는 취지를 드러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대통령 선거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개연성은 더욱 짙어진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 = 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 = 연합뉴스]

여당의 이 같은 움직임은 송영길 민주당 대표 등의 추경 필요성 언급에서 비롯됐다. 송영길 대표는 최근 “추경을 통해서라도 자영업자 손실 선보상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추경 편성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국민의힘도 어정쩡한 가운데 추경 논의에 응할 뜻을 밝히고 있다. 국회가 한목소리로 추경 편성을 요구하고 있고, 정부는 국회 요구가 있으면 ‘점검’하고 ‘판단’하겠다고 나선 마당이니 추경 편성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추경 편성 움직임은 국민들로부터 설득력을 얻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극복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미 새해 본예산이 감염병 사태라는 비상한 상황을 고려해 607조에 달하는 초슈퍼급으로 편성돼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본예산만 해도 적자 구조로 짜여져 있다. 새해 예산안의 국회 통과 이후 상황이 특별히 바뀐 게 없다는 점도 추경 편성의 부당함을 말해준다.

해가 바뀌기도 전부터 추경을 기획했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심의·의결한 새해 예산안이 그만큼 엉터리였음을 확인하는 꼴이기도 하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자세다. 추경은 그 편성권을 지닌 정부가 움직이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추진이 불가능하다. 단지 심의·의결권을 지닌 국회가 선거를 의식해 편성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에 응한다면 독립적인 행정부의 권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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