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조근우 기자] “우린 오랜 세월 빼앗고 속이고 죽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린 고결한 자들(Nobleman)로 불리고 있었다. 허나 그 고결함의 뿌리는 기사도가 아니라 우리의 강인함과 무자비함이었다.”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킹스맨)에 주인공인 옥스퍼드 공작이 자신의 아들 콘래드에게 하는 회고다. 영국의 귀족 옥스퍼드 공작은 이 대사를 통해 현재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이면에는 착취와 인권유린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말은 귀족(Nobleman)이라는 명예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삶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옥스퍼드 공작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재산보다 더 중요한 ‘인류의 더 나은 공존’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킹스맨 에이전시를 설립한다. 이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과 일견 닮아있다. ESG경영의 본질적인 방향성은 인류의 더 나은 공존을 위함이다.

이에 맞춰 기업들은 ESG위원회를 설립하고 친황경 사업 확대, 경영 전략 등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대주주들의 사재를 지키기 위해 자회사를 상장시키며 소액주주를 희생시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미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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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자회사 상장랠리, 그 명과 암

2022년에도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대주주들을 위한 상장랠리가 펼쳐진다. LG에너지솔루션을 필두로 SSG닷컴(SSG), 올리브영,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오일뱅크까지 기업공개(IPO) 대어들이 몰려온다. 또한 카카오엔터테이먼트와 카카오모빌리티도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형 IPO가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를 보인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기준 2020년 신규 상장 종목 109개 중 95개 종목이 공모가 대비 상승 마감했고 이들의 평균 수익률은 60.6%를 기록했다.

하지만 증시에 병주고 약준다는 비판도 있다. 자회사의 상장으로 인해 모회사의 주가 하락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개인투자자와 증시에 악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1년 사이에 100만원을 넘겼던 LG화학의 주가는 6일 종가 기준 69만원을, 17만원을 넘었던 카카오는 10만원을 기록했다. 19만원까지 올랐던 이마트의 주가도 14만 6500원에, 16만원을 넘었던 한국조선해양도 10만2000원에 마감했다. 12만원 가까이 올랐던 CJ의 주가도 8만1300원까지 내려왔다.

자회사의 IPO가 모회사의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이유는 △모회사와 자회사 이익의 이해 상충 리스크가 있고 △모회사와 자회사가 함께 상장돼 있을 때 모회사가 보유한 자회사의 지분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모회사 디스카운트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미 상장된 모회사에 투자한 일반 주주들은 피해를 본다. 자회사의 공모 신주 배정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물적 분할을 두고 개인투자자들과 국민연금은 반대 입장에 섰다. 지배주주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 이익을 침해한다는 논리다. 실제로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물적 분할 후 상장은 암묵적으로 금지돼있고, 물적 분할은 주로 사업부문 전체를 매각할 때 사용된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이사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자회사 이사회의 독립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모자회사 동시상장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증권시장에서는 자회사의 상장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너 일가를 비롯한 대주주에게는 자회사의 상장이 득이 되기 때문이다. 자회사의 물적 분할 후 IPO는 대주주 관점에서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또 지분율 희석 없이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카카오 CI. [이미지 = 카카오 제공]
카카오 CI. [이미지 = 카카오 제공]

◇ LG에너지솔루션, 상장회사라고 볼 수는 있나?

LG에너지솔루션이 밝힌 총 공모주식수는 4250만주다. LG에너지솔루션이 신 주 3400만주를 발행하고 모회사인 LG화학이 보유한 LG에너지솔루션 지분 2억주(100%) 중 4.25%에 해당하는 850만주를 구주매출로 내놓는다. 총 공모주식수는 공모 후 LG에너지솔루션의 전체발행주식수(상장예정주식수 2억 3400만주)의 18.16%에 해당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금번 기업공개(IPO)를 통해 확보한 공모 자금을 △국내 오창 공장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시설자금 △북미·유럽·중국 등 해외 생산기지 생산능력 확대를 위한 타법인 증권 취득자금 △리튬이온전지·차세대전지 등 연구개발 및 제품 품질 향상·공정 개선을 위한 운영자금 목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대주주가 80% 이상 주식을 가진 회사를 상장회사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모든 의사결정은 대주주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주식은 의결권이 의미가 없는 사실상 ‘우선주’에 가깝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미지 = 연합뉴스]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미지 = 연합뉴스]

◇ SSG IPO, 사모펀드 배불리기?

신세계그룹은 SSG를 별도 법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사모펀드(어피니티 에퀴티 파트너스AEP·BRV 캐피탈)로부터 1조원의 투자를 받았다. 2019년 3월 이마트는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사모펀드로부터 SSG닷컴에 투입할 자금 7000억원을 수급했다.

SSG가 사모펀드(AEP·BRV)와 체결한 계약을 유지하려면 2023년까지 총거래액(GMV) 요건 또는 IPO를 달성해야 한다. 두 조건 중 하나를 맞추지 못하면 사모펀드는 소유주식 전부를 이마트·신세계에 매도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SSG가 단기간에 총거래액을 늘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 이커머스 시장에는 쿠팡과 네이버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SSG도 이를 몰랐을리 없는 만큼 투자를 받는 순간 IPO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모펀드가 투자할 당시 SSG의 기업가치는 3조333억원으로 추산됐다. 현재 SSG의 시가총액은 1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분석되는 만큼, 사모펀드의 지분도 2조원 내외로 평가된다. 사모펀드는 SSG가 IPO를 하면 구주매출을 통해 큰 이익을 보고 지분을 매각할 수 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사진 = 연합뉴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사진 = 연합뉴스]

◇ 올리브영·현대엔지니어링·현대오일뱅크,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IPO

올리브영의 IPO는 CJ그룹 경영권 승계와 맞물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선호 부장은 지난해 27일 CJ그룹 ‘정기임원 인사’에서 CJ제일제당 임원으로 승진하며 승계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선호 부장과 이경후 부사장은 올리브영의 지분(각각 11.09%, 4.26%)을 매각해 CJ 지분 확대에 나설 거라고 분석된다. 현재 이선호 부장과 이경후 부사장의 CJ 지분율(보통주 기준)은 각각 2.75%, 1.19%에 불과하다.

이경후 CJENM  부사장(왼쪽부터)과 이선호 CJ제일제당 경영리더. [사진 = 연합뉴스]
이경후 CJENM  부사장(왼쪽부터)과 이선호 CJ제일제당 경영리더. [사진 = 연합뉴스]

현대오일뱅크의 상장도 정몽준 이사장에서 장남 정기선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와 무관치 않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현대중공업지주의 지분은 정몽준 이사장이 26.6%, 정기선 사장이 5.26% 보유하고 있다. 정기선 사장이 부친의 지분을 상속·증여받으려면 막대한 세금을 감당할 현금이 필요하다. 결국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 상장을 본격화했다고 분석된다.

현대중공업지주는 2019년 2705억원을 배당했다. 같은 해 별도 기준 당기순이익(5909억원)을 감안하면 배당성향이 45.8%였다. 지난해에는 당기순이익이 864억원이었지만 배당금은 2705억원으로 같은 규모를 유지해 배당성향이 312.9%에 달했다. 올해는 3분기까지 배당금지급액이 3922억원으로 더 크게 늘었다. 현대중공업지주가 내년에도 비슷한 규모로 배당을 하거나 늘릴 경우 현대오일뱅크 구주매출분이 배당을 위한 실탄이 될 수도 있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사장. [사진 = 연합뉴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사장. [사진 = 연합뉴스]

현대엔지니어링 노조는 IPO를 반대하며 금융감독위원회에 탄원서를 냈다. 사실상 대주주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자기 이익 챙기기라는 것이다.

노조 측은 사측의 과도한 구주매출을 문제 삼았다. 공모주 1600만주 중 신주의 모집은 400만주에 그치지만 1200만주는 구주 매출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자금의 25%는 회사에 유입되고, 나머지 75%는 기존의 대주주에게 돌아간다. 주당 공모 희망가 최하단인 5만7900원을 적용해도 대주주인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몽구 명예회장 및 정의선 회장에게 약 4000억원이 지급된다. 정 회장의 경우 지분율은 11.72%에서 4.45%로 낮아진다. 이 자금은 정의선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 지분승계 및 지배구조 개편에 흘러 들어갈 것이 유력하다.

노조 측은 탄원서에 “현대엔지니어링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기업으로 상장신청기업에 요구되는 질적 심사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기업”이라며 “상장 추진은 개인 대주주의 자기 이익 챙기기의 극단을 보여준 사례”라고 주장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 = 연합뉴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사진 = 연합뉴스]

◇ 자회사 쪼개기 상장, 해결책은?

“물적분할로 모회사의 대주주는 지배력과 이익이 높아지겠지만 소액주주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물적분할 후 자회사 상장 시 모회사 주주에 대한 합리적인 보호를 통해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장해야 한다”

6일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최로 ‘모자회사 쪼개기 상장과 소액주주 보호-자회사 물적분할 동시 상장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 축사로 이재명 대선후보가 전한 말이다. 정치권에서도 자회사 쪼개기 후 상장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이날 토론회에서 기업의 물적분할 이후 자회사 상장의 본질은 기업지배구조 문제고 일반 주주가 ‘들러리’를 서는 동안 지배주주의 주식이 ‘황금주’처럼 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물적분할 뒤 자회사 상장은 기업이 알짜 사업을 분리·독립 상품화해 분리 추출한 뒤 일반주주의 지배권·처분권을 몰취하는 효과가 있고, 이때 지배주주는 주주권을 100% 독식하게 된다”며 “경영진의 이해 상충·주주가치 훼손 금지는 주식회사의 기본 원칙상 당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의 주주가치 훼손·편취를 금지하는 주주 보호 의무(SIS) 선언 등이 직접적인 대응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물적분할 제한요건 설정 △기관투자자의 부당한 물적분할 찬성 제한 △반대주주의 주식매수청구권 신설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관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도 “모자회사 동시 상장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대립이고, 이는 결국 기업지배구조 이슈”라며 “기업에 자금이 필요한 유망한 핵심 부서가 있어서 유상증자하려 한다면 모회사가 증자하면 되지만 이 경우 지배권이 위협을 받게 되고, 지배주주들한테는 지배권이 위협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자회사 분할 상장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애초 주주들한테 피해가 갈 것을 알았다면 이사회에서 통과가 안 됐어야 하지만 지금은 통과가 돼도 불법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일반주주의 주주권 확립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대안으로는 △ESG의 G 평가 시 물적분할 반영을 제시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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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재벌 중에는 옥스퍼드 공작은 없는 걸까?

메리츠 자산운용 존 리 대표는 우리나라를 ‘금융문맹’ 국가라고 표현한다. 부동산부터 주식, 예금까지 금융지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이를 잘 활용한 덕일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자회사 상장이 당연시 되는, 글로벌 기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자회사 상장 문화가 증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남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분사 뒤 상장해 자금을 조달하는 곳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며 “경영진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이사회는 전혀 견제하지 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단적인 사례”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분명 재벌그룹 회장들이 그룹 전체에 대한 결정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자회사 상장 행보는 소액주주들과 공존이나 상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LG에너지솔루션, SSG, 올리브영,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오일뱅크 모두 공교롭게 후대 경영을 공고히 하기 위한 상장이라고 진단된다.

이 선택은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재벌이었기에 킹스맨의 옥스퍼드 공작과 더욱 대비된다. 옥스퍼드 공작은 자신이 공작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삶에 책임감을 느끼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반면,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들을 희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소액주주의 권익도 생각하는 재벌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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