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금융감독원에 해마다 지원하던 100억원 규모의 출연금을 삭감하기로 했다. 한은은 금감원이 금융사들로부터 출연금을 받아 수백억원의 이익을 내는 마당에 계속 부담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그동안 양측 간에 쌓인 앙금이 표출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9일 한은에 따르면 금융통화위원회는 2020년 12월 예산안을 확정하면서 2022년부터 금감원 출연금을 삭감하기로 결정한데 이어 지난해 12월 금감원 출연금을 삭감한 2022년 예산안을 확정한 바 있다. 한은이 출연금을 낸 배경은 금감원의 모태가 한은 소속 은행감독원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금융위기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등 금융감독기구의 통합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한은에서 떼어낸 은감원을 주축으로 금감원을 설립했다. 금감원은 새 청사를 마련하기 위한 재원 등을 위해 한은에 국공채 7000억원 규모의 출자를 요구했다. 한은은 이를 거절하는 대신 출연금을 지원했다. 한은은 금감원의 정착 지원과 업무협력을 위해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해마다 일정 규모의 예산을 지원해왔다. 첫해 413억원을 지원한 이후 규모를 줄여오다 2006년부터 연간 100억원으로 굳어졌다. 금감원은 올해 출연금 163억원을 요청했지만 한은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한국은행. [사진 = 연합뉴스]
한국은행. [사진 = 연합뉴스]

한은과 금감원은 출연금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은은 “2020년 12월에 2022년부터는 금감원 출연금을 삭감하기로 결정했다”며 예고된 중단이라고 주장했다. “한은이 금감원에 출연한 동기는 금감원 설립 초기의 안정적 운영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현재는 금융사들의 수익이 증가해 금융사 분담금만으로도 자체 경비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한은 출연금은 금감원 출범 당시 총예산의 31.2%였지만 지난 5년 동안 2.7∼2.8%에 불과했다. 더욱이 금감원의 수지차익(총수입-총지출)이 2017년 466억원에서 2020년 624억원으로 해마다 늘어났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한은의 출연 동기는 금감원 설립 초기의 안정적 운영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현재 금융사들의 수익이 증가해 금융사 분담금만으로 자체 경비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만큼 지원 동기가 충분히 달성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융위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은 금감원의 경비충당 재원을 열거할 뿐 한은의 출연을 강제하는 조항은 아니다”며 “출연금이 국민 세금에서 나오는 만큼 최소한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금감원은 입장문을 통해 “갑자기 한은이 출연을 중단하면 금융사 부담이 증가한다”며 “한은과 감독 당국의 공동 검사, 정보 공유 등에 대해 경비를 분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현행법상 한은이 금감원에 공동 검사와 자료 공유를 요청하면 금감원은 무조건 응해야 한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금융사로부터 받는 업무보고서를 한은에 공유하고, 공동 검사 인력도 투입하고 있다”며 “해당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출연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은의 출연금 삭감 시 금융회사 490여곳이 100억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데, 각 사의 감독 분담금은 평균 2024만원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한은은 “한은의 금융사에 대한 공동 검사 및 자료 제출 요구권은 한은법에 보장된 사항으로 이를 위해 한은이 별도로 비용을 지급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한은도 한은법에 규정된 금융안정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집한 금융사 경영실태 분석 자료 등을 별도의 비용을 징수하지 않고 금감원에 제공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은의 출연금 삭감은 이미 예견됐다. 금감원·금융위와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권한도 침해받고 있다고 판단하는 한은이 유일한 반격수단인 출연금을 활용했다는 시각이 많다. 한은은 한솥밥을 먹었던 금감원과 줄곧 갈등을 빚어왔다. 공동 검사와 자료 공유에 소극적인 금감원에 대한 앙금이 쌓일 대로 쌓였다는 것이다.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 개정안을 둘러싼 금융위와의 갈등이 삭감 배경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전금법 개정안은 빅테크 업체를 ‘종합지급결제사업자’로 지정해 양성화하고 빅테크 기업의 자금거래 투명성 확보를 위해 ‘전자지급거래 청산업’을 신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빅테크 기업은 이용자와 금융거래를 할 때 외부 청산기관인 금융결제원을 거치도록 한 것이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한은은 빅테크 업체가 금융결제원에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고객의 모든 전자지급거래 정보에 대해 금융위가 별다른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한은은 “명백한 빅브라더(사회통제권력)법”이라며 반발했다. 이에 은성수 당시 금융위원장은 “화가 난다”는 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강하게 되받아쳤다. 전금법 개정안은 이후 국회의 관련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한 채 계류돼 있다.

여기에다 금융위는 2019년 금융결제원장 자리를 사실상 한은으로부터 빼앗아 왔다. 1986년 금융결제원 설립 이후 한은 출신이 줄곧 원장 자리를 맡아 오다 2019년 처음으로 한은 출신이 아닌, 금융위 상임위원 출신이 원장에 선임된 것이다. 오는 4월 말 끝나는 후임 원장 자리를 놓고 금융위와 한은은 정면 충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의 낮은 임금 인상률도 거론된다. 한은의 올해 임금 인상률은 0.9%대 안팎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금융사와 금융공기업의 2~5% 인상률을 크게 밑돈다. 한은의 예산권을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 결정을 놓고 한은 임직원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는 후문도 있다. 기재부와 금융위·금감원 등 정부와 유관기관 등쌀에 시달리던 한은이 반격 수단으로 금감원 출연금을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금감원의 예산권을 통제하는 금융위는 현재 출연금을 놓고 한은과 막판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한은 간 협의로 금감원 출연금 갈등이 해소될 수도 있다. 한은이 출연금 중단을 결정한 2020년 12월은 금융위와 갈등이 높았을 때였다. 하지만 지난해 9월 한은 금통위원 출신인 고승범씨가 금융위원장에 취임하면서 두 기관은 화해 무드로 돌아섰다. 한은은 2010년에도 한은법 개정을 두고 금감원과 갈등을 빚던 중 출연금 중단을 통보했다가 철회한 바 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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