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오락가락 행보가 심심찮게 도마에 오르고 있다. 발권력 조절과 통화정책의 적절한 운용을 통해 정부의 그릇된 경제정책 추진을 견제해줄 최후의 보루가 한은이라는 점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한은이 지난해 8월부터 미국 등보다 한 발 앞서 선제적으로 기준금리 인상 행보에 나선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은의 금리정책 기조 변화는 정부가 헤픈 재정 운용을 이어가면서 대선용이란 혐의가 짙은 ‘눈꽃 추경’까지 추진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 움직임이다. 이로 인해 재정당국과 통화당국이 엇박자 행보를 보인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재정 및 통화 당국의 엇박자 행보로 인한 혼란은 시장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끝간 데 없는 방만한 재정운용은 한은의 금리정책 효과를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을 통한 정부의 지속적 돈풀기는 국제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 등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을 누그러뜨리려는 한은의 노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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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적인 추경은 필히 시중에 유동성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한은이 아무리 금리를 끌어올린다 한들 금리정책이 의도대로 먹혀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부와 한은 간의 정책 엇박자에도 불구하고 비난의 화살은 재정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정부 쪽으로 쏠려 있었다. 재정 당국의 행보가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잘못 나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한은은 의연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은 한은의 긴축 행보가 다소 빠르다는 일부의 비판까지 잠재워주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은마저 정부의 잘못된 움직임에 발을 맞추려는 조짐을 드러내면서 더 큰 우려를 낳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은의 자산매입이다. 정부가 헤픈 씀씀이를 뒷받침할 목적으로 국채를 남발하자 한은이 그 물량을 일부 수용해주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독립성을 기반으로 나름의 통화정책을 펼쳐야 할 한은이 정부의 그릇된 장단에 맞춰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는 얘기다.

국채의 빈번한 발행은 국가채무를 늘리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부작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분산 발행에 힘쓴다 해도 정부의 국채 남발은 시중금리를 급속히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그런 움직임은 이미 시장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국채 남발은 국고채 가격을 하락시키면서 그 반대 급부로 국고채 금리를 상승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이는 금융채와 회사채 금리를 동시에 끌어올려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을 높이는 부작용으로 이어진다.

더 시급하게 다가오는 문제는 시중 유동성의 증가다. 한은의 국채 매입은 시중에 그만큼의 돈이 뿌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가 제로금리 상태에서 2년여 동안 실시해온 양적완화와 같은 성격의 조치라 할 수 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채를 사들이는 것은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정책방향을 긴축으로 전환하고도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마지못해 국채 매입에 나서고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한은은 지난해 8월부터 기준금리를 세 차례 올렸으면서도 이달 초엔 국채를 2조원어치나 사들였다. 그리고 지난 11일엔 이주열 한은 총재가 국채의 추가 단순매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추가 매입 검토 뜻을 밝힌 날은 공교롭게도 이 총재와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만남이 이뤄진 날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정부 쪽 주장대로 국채 발행분 일부를 한은이 추가로 단순 매입하는 것을 ‘정책 공조’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제 상황 속에서도 그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지난 11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만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왼쪽 두번째)와 홍남기 경제부총리(왼쪽 세번째). [사진 = 연합뉴스]
지난 11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만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왼쪽 두번째)와 홍남기 경제부총리(왼쪽 세번째). [사진 = 연합뉴스]

논란이 일자 한은은 지난 15일 설명자료를 내고 “국고채 단순 매입을 통해 추경을 뒷받침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 총재의 앞선 발언에 대해서는 “시장 불안 조짐이 나타날 경우 한은이 안정화 조치를 시행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한은은 “시장 상황을 봐가며” 적절히 대응해 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시장의 우려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재정 당국자와 중앙은행 수장은 일정 정도 거리를 두며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무너지면 경제정책이 견제 없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성이 크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런 까닭에 재정 당국자와 중앙은행 수장의 만남은 늘 그 자체로 커다란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행사를 통한 것이긴 했지만 홍남기 부총리와 이주열 총재의 최근 만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민감한 시기에 이뤄진 만남이다 보니 두 사람이 동향 출신이라는 점까지 새삼스레 부각됐다.

이런 만남이 이뤄질 때일수록 중앙은행 총재의 발언은 더욱 신중해져야 할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 심지어 토씨 하나의 차이에 의해서도 시장에 주는 메시지는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엔 더더욱 그렇다고 봐야 한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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