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하는 대통령선거 후보 TV토론회가 두 차례 진행됐다. 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릴 목적으로 유권자들은 지난 달 21일의 경제 분야 토론에 이어 25일 진행된 정치 분야 토론회를 인내심을 갖고 지켜봤다.

하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는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유권자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토론회를 지켜본 다수 시청자들은 두 번째엔 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히려 더 저질스러워진 토론회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 지켜보긴 했지만 방송 시간 내내 불편함과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고, 그런 감정의 찌꺼기는 TV 시청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3차 법정토론은 절대 보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됐다.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질 낮은 인신공격성 발언의 난무였다. 특정 후보의 그런 발언에 쾌재를 부르며 후련해 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건 소수 열성 지지자들에 국한된 일일 것이다. 대다수 유권자들은 주제와 무관한 저질 공격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대선 후보 토론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갖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눈살을 찌푸리게 한 대표적인 이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였다. 이 후보의 공격은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 집중됐다. 윤 후보 집중 공략이야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논리도 팩트도 없는 비방과 빈정거림으로 범벅이 된 공격 방법이었다.

이 후보가 윤 후보를 향해 “정말 문제이십니다”라고 말한 건 그중 양반이었다. 그는 윤 후보를 향해 “마스크 잘 안 쓰시죠? 부인도 잘 안 쓰시더군요”라고 빈정댔는가 하면 “안방 장비”니 “빙하 타고 온 둘리”니 하는 조롱을 가하기도 했다. 그래도 양이 안 찼던지 그는 준비해온 패널을 꺼내들면서 “윤석열은 죽어”라는 논란 많은 대장동 관련 녹취록 문구를 직접 읽기까지 했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 윤 후보가 “녹취록 뒷부분에 ‘이재명 게이트’란 말이 나온다”고 응수하자 “허위이면 후보사퇴할 거냐”라고 다그친 장면이었다. ‘악마의 편집’과 신뢰성 논란에 휩싸여 있는 녹취록이지만 그 속에 ‘이재명 게이트’란 말이 들어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걸 몰랐을 리 없는 이 후보가 그렇게 응수한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라고 하면 거짓말 시비에 휘말릴 테니 그렇게 반격해 상대를 움찔하게 함으로써 사실을 호도하려 했던 게 아닌가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선관위 주관 2차 토론은 이 후보의 인신공격성 비난을 윤 후보가 “팩트에 근거해 질문을 하시죠”라 유연하게 받아넘김으로써 진흙창 싸움으로 변질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심정은 조마조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듣건대 대선 후보 토론회가 이전투구로 이어져 세계적 망신을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후보의 조롱성 발언은 곤궁에 처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까지 연장됐다. 그는 약소국 국민과 함께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에 맞서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두고 “무능하고 아마추어 같다”라고 비꼬았다. “초보 정치인”인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충돌이 발생했다는 취지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를 참혹한 전장터로 만든 러시아의 침공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한 발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발언은 토론회 이후 파장을 일으키며 논란을 낳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한국을 우크라이나의 본보기로 삼고 싶다고 말해온 인물이다.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의 그늘에 머물기를 거부하며 한국처럼 지정학적 불리를 딛고 경제 번영을 이룩해 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윤 후보의 답변을 들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을 연출한 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는 상대를 모욕하는 비신사적 행위였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협량함을 자인하는 것은 물론 토론회의 품격까지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이 장면은 5년 전 토론회에서 “제가 MB 아바타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던 것 못지않게 두고두고 회자될 안 후보의 실책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는 한 후보가 상대 후보의 발언 도중 의도적으로 한숨을 푹 푹 쉬었다가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당시의 매너 논란은 ‘똑똑한’ 앨 고어 후보가 ‘멍청한’ 조지 부시 후보에게 간발의 차로 패배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낳았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독선적 자세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 후보는 토론회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주식 양도세가 왜 도입됐는지 아시냐”는 질문을 던졌다. 윤 후보가 머뭇거리자 심 후보는 느닷없이 ‘삼성’을 그 이유로 꺼내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질문은 자신만의 주관적 답을 미리 정해놓은 뒤 상대를 당황시키려 작심하고 준비했다는 의심을 살 만한 것이었다.

경제전문가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과연 “삼성 때문”이라 답할 이가 있을까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질문이자 자답(自答)이었다. 하나의 계기가 될 수는 있었을지언정 한 국가의 세제가 특정 기업에 제재를 가할 요량으로 만들어졌다는 인식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심 후보가 전직 대통령 한 명에 한해 시종 “○○○씨”라 호칭한 것도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자신의 지지자들이 모인 유세장도 아니고 전국민이 지켜보는 TV토론회에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포용해야 하는 대통령직 후보로서의 자격에 의문 부호를 붙이게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과거 토론회에서 모 후보가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고 해 비난을 샀던 일을 연상시켜주었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두 차례의 선관위 주관 TV토론회는 질적 시비를 부른 것 외에 내용면에서도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지금까지 경제 및 정치 분야 토론회가 진행됐지만 우리 사회의 굵직한 현안들인 집값 및 임대료 문제, 잠재성장률 저하 문제, 양극화 문제, 탈원전 정책의 후유증, 한반도 비핵화 및 한미동맹 문제 등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토론은 엿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자기 주장들만 앞세우며 상대방 깎아내리기에 몰두하는 듯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후보들이 토론회를 장학퀴즈 프로그램으로 착각한 듯 단편적이고 암기된 답을 요하는 질문을 쏟아낸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만기친람하듯 국정 구석구석을 직접 챙기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같은 질문에는 다분히 상대를 골탕먹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교언(巧言)과 동문서답으로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고자 하는 후보들의 모습도 토론회를 지켜보는 유권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잘못에 대해서는 진솔하게 사과하고, 특정 현안에 대한 인식 부족이 드러날 경우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 것은 대선 후보로서의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들은 이런 유권자들의 기대에는 아랑곳없이 수단·방법 안 가리고 상대를 공격해 표를 빼앗아오려는 자세를 드러냈다. 그러는 사이 대선 후보 TV토론회는 이제 시정잡배들의 술자리 수다만도 못한 수준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런 토론회라면 국민들의 정신건강 측면에서 보나 국가의 품격 유지 필요성 측면에서 보나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 이제라도 후보들의 진지한 성찰이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인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