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대폭 낮추고 있다. 지난주 전세자금 대출규제를 푼데 이어, 마이너스통장 한도와 직장인 신용대출도 지난해 규제 이전 수준으로 되돌릴 예정인 만큼 당국의 ‘구두지도’에 따라 도입된 각종 대출규제 가운데 사실상 ‘연봉 이내 신용대출’ 정도만 남는 셈이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KB·신한·하나·우리은행은 신용대출상품 통장대출(마이너스통장) 한도를 가계대출 총량규제가 본격 강화되기 이전 수준으로 복원한다. 우리은행은 다음달 4일부터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5000만원에서 8000만∼3억원까지 늘리기로 했다. 지난해 1월 모든 마이너스통장의 한도를 5000만원으로 낮춘 지 1년 2개월만이다.

신한은행도 마이너스통장과 일반 신용대출 한도 복원을 검토 중이다. 이르면 다음 주부터 시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신한은행의 마이너스통장 한도도 5000만원에 묶여 있고, 신용과 상관없이 일반 직장인 신용대출도 1억5000만원 이상 받을 수 없다.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은 이미 마이너스통장과 신용대출 한도 대부분을 지난해 상반기 수준으로 돌려놓았다. 국민은행은 지난 7일부터 한도거래 방식 마이너스통장의 한도를 전문직군 상품(KB닥터론·KB로이어론·에이스전문직 무보증대출 등)은 최대 1억5000만원, 일반 직장인 상품(KB직장인든든신용대출·KB급여이체신용대출·본부승인 집단신용대출 등)은 1억원으로 늘렸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NH농협은행도 이번 주 중 마이너스통장 한도 복구를 검토한다. 농협은행의 한 관계자는 “영업 현장의 수요를 점검한 후 한도 상향 여부를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당국의 가계대출 축소 요청 등에 따라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일괄적으로 5000만원까지 줄인 뒤 6개월 만에 ‘정상화’한 것이다. 하나은행의 경우 일찌감치 지난 1월 말 ‘하나원큐신용대출’의 마이너스통장 대출 한도를 5000만원에서 최대 1억5000만원으로 높이는 등 8개 주요 신용대출 상품의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지난해 8월 이전 수준으로 되돌렸다.

일반 신용대출 한도도 풀렸다. 우리은행은 다음달 4일부터 대표 신용대출 상품인 ‘우리 원(WON)하는 직장인대출’의 한도도 최대 1억원에서 2배인 2억원으로 늘렸다. 농협은행은 지난 1월과 2월 두 차례 상향을 거쳐 현재 한도는 최대 2억5000만원이다. 신한은행은 현행 1억5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한도 복원을 검토 중이다.

이에 앞서 우리은행을 필두로 5대 은행이 지난해 가계대출 총량 관리를 위해 도입했던 전세자금대출 규제를 모두 풀었다. 전세계약을 갱신할 때 보증금 증액분까지만 받을 수 있었던 전세대출 한도는 ‘전체 보증금의 80%’로 원상복구되고, 잔금을 치른 이후에는 불가능했던 전세대출 신청기간도 다시 확대된다. 1주택 보유자의 경우 신청 자체가 금지됐던 비대면 전세대출 제한도 풀린다.

농협은행과 국민은행은 각각 지난 25일, 30일부터 전세계약을 갱신하는 세입자에 대해 보증금 증액범위 이내로 제한했던 전세대출 한도를 ‘전체 보증금의 80%’까지로 다시 확대하기로 했다. 은행들은 지난해 10월 당국의 가계대출 규제에 따라 전세대출 한도를 제한했다. 우리은행이 21일부터 전세대출 한도를 복원하겠다고 밝히자 신한·하나은행도 25일부터 전세대출을 정상화했다. 농협·국민은행도 합류하면서 5대 은행의 전세대출 규제가 모두 풀리게 됐다.

이에 따라 전세계약을 갱신하는 세입자는 전셋값 증액 여부와 관계없이 보증금의 80%까지 꽉 채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전셋값이 3억원인 아파트에 1억원 전세대출을 받아 살고 있던 세입자가 계약갱신 후 보증금이 4억원으로 올랐다면 이제까지는 보증금 증액분인 1억원까지만 추가대출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새 보증금의 80%(3억2000만원)에서 기존 대출금을 뺀 2억2000만원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에 비해 금리가 워낙 많이 오른 탓에 전세대출을 연장할 때도 보증금 증액분만큼만 추가대출을 받으려는 세입자가 대부분”이라며 “은행이 인위적으로 대출을 제한할 필요가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전세대출 신청기간도 ‘잔금 지급일’에서 ‘잔금 지급일 또는 주민등록전입일 중 빠른 날로부터 3개월 이내’로 다시 확대된다. 이럴 경우 다른 곳에서 구한 돈으로 전세금을 내고 우선 입주한 세입자도 전입일로부터 3개월까지는 전세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 1주택 보유자는 신청할 수 없었던 비대면 전세대출 제한도 풀린다. 비대면 대출만 취급하는 카카오뱅크 역시 1주택자 전세보증금 대출을 재개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은행들이 문턱을 낮추는 이유는 올 들어 가계대출 감소세가 이어지면서 대출을 막을 이유가 사실상 없어졌기 때문이다.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이달 24일 기준)은 705조2932억원으로 집계됐다. 2월 말 대비 6441억원 감소한 규모다. 이달 말까지 사흘 남았지만 증가세로 전환할 가능성은 낮다. 5대 은행 가계대출은 올해 1월과 2월 각각 1조3634억원, 1조7522억원 줄며 이례적으로 2개월 연속 감소했다.

이들 은행의 가계대출이 감소한 이유는 정부의 가계대출 규제가 이어지는 가운데 주택가격 상승세가 꺾이면서 주택관련 대출이 크게 늘지 않아서이다. 글로벌 긴축 움직임이 본격화하며 시중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자 대출수요는 줄었다. 3월 들어 24일까지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은 각각 6033억원, 1757억원 증가하는 데 그쳤고 신용대출은 1조293억원 감소했다. 투자환경이 녹록지 않고 금리인상도 가시화된 탓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주식·코인 호황이 언제 다시 올지 불투명하고 부동산 가격도 예전 같지 않아서 ‘빚투(빚내서 투자)’ 수요가 적다”며 “대출금리도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출 문턱을 무조건 낮추는 것은 위험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증가세는 한 풀 꺾였지만 2000조원에 육박한 가계부채는 여전히 위험요소인 만큼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용상 금융연구원 금융리스크센터장은 “지금은 DSR 규제대상에서 전세대출 등이 빠져 있지만 가계가 보유한 모든 대출을 DSR 규제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