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장들의 임기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골칫거리가 된지 오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련된 논란이 반복돼 일어나지만 뚜렷한 해결책 없이 지금까지 방치돼 왔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논란의 배경엔 정권과 기관장 임기의 미스매치라는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장은 법에 의해 3년 임기를 보장받는 자리다. 반면 정권의 임기는 5년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어느 정권이든 초기엔 으레 이질적 기관장들과의 불편한 동거를 견뎌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이는 것은 필연적 현상이다. 갈등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 갈등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와 경제 분야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 홍장표 원장 간의 갈등이었다. 갈등을 본격화시킨 것은 한덕수 총리의 작심 발언이었다. 한 총리는 지난주 취임 1개월을 맞아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홍 원장 거취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소득주도성장 설계자가 KDI 원장으로 앉아 있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단언했다. “바뀌어야 한다”는 직접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다.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사진 = 연합뉴스]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사진 = 연합뉴스]

홍 원장은 반발했다. 잠시 숙고한 듯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인 지난 6일 입장문을 내고 정부와 국책연구기관 간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총리 발언에 “크게 실망했다”고 반발했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다른 저의 의견에 귀를 닫겠다면 KDI 원장으로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의 반박 글에는 새겨들을 만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KDI와 국책연구기관이 정권의 나팔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이란 감정적 표현이 전제돼 있긴 하지만, 그는 “법을 바꾸라”는 유의미한 제언을 남겼다.

홍장표 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설계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와는 애당초 코드가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실패로 귀결된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특히나 자유시장경제의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세력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아온 터였다.

더구나 홍 원장은 문재인 정권의 임기가 1년가량 남은 상태에서 임명됨으로써 ‘알박기’ 논란의 한 가운데 있던 인물이었다. 법대로 하자면 2년 가까이 윤석열 정부와 갈등 속에 동거를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혀 새로운 경제정책 방향을 설정해둔 윤석열 정부 인사들에게는 홍 원장이 눈엣가시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도 경제에 대한 기본철학이 다른 그가 새 정부의 경제 관련 국책과제를 이해하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도록 KDI를 이끌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 해도 문제다. 그럴 경우 자신의 경제철학이나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에 의문 부호가 따라붙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원장은 새 정부 출범 이후 두 달가량 버티기를 시도했다. 국책연구기관장은 법에 의해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임기 3년’이 보장된다는 것이 버티기의 명분이었다. 형식논리상 그의 버티기엔 명분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제정책이 정권의 명운과 평가를 좌우하는 핵심 이슈인 만큼 그의 버티기는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홍장표 원장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에게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해 고민해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해답은 홍 원장의 사퇴의 변을 통해 이미 제시돼 있다. 법을 바꾸는 게 답이라는 것이다. 우선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은 사회과학 분야 국책연구기관장의 임기 규정을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듯하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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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연구기관은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과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을 근거 삼아 설립된 연구기관을 말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전자의 법률에 의해 설립·운영되고 있는 24개 정부출연 연구기관, 즉 사회과학 분야 국책연구기관들이다. 여기엔 KDI와 함께 또 다른 ‘알박기’ 논란을 낳다가 최근 원장이 사의를 표명한 한국노동연구원(KLI)은 물론 ‘친문 인사’들이 기관장으로 있는 국토연구원·한국보건사회연구원·산업연구원 등도 포함돼 있다.

과학기술 분야와 달리 경제와 노동 등을 포함하는 이 분야의 국가정책은 정권에 따라 그 방향성이나 정체성을 달리하기 십상이다. 그런 만큼 연구·개발해야 할 국책과제의 성격도 정권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커진다. KDI가 지금까지 역대 정권의 정책의지를 반영해 때론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같은 성장위주 정책을, 어떤 시기엔 분배에 방점을 찍은 경제정책을 연구·개발한 것도 상황논리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국가정책을 연구·개발하는 연구기관의 장이 정부의 정책방향을 거스르는 철학을 지닌 채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국익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법적 현실은 그런 불합리를 강요하고 있다. 관련법이 잘못돼 있다는 뜻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은 고치는 게 당연하다. 가장 시급해 보이는 것이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의 개정이다. 이 법의 적용을 받는 기관 중에서도 ‘낙하산’ 및 ‘알박기’ 논란을 자주 일으키는 곳을 선별해 기관장 임기제에 변화를 가하는 것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기관장 임명에 정무적 판단이 크게 작용하는 곳이 우선 대상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 이들 기관의 장에 한해서는 임기를 규정한 법률 조항에 단서를 붙이는 방법으로 임기를 제한하는 것을 적극 검토해볼 때가 됐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은 정치뿐이다. 그래서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이 시간만 때우며 돌아가는 정치권의 결단이 더 아쉬울 따름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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