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최진우 기자] 한국은행이 8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제시한 해법은 ‘베이비스텝’이었다. 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경기의 하방 위험이 커지고 있는 현실이 금통위의 긴축 행보를 조심스럽게 한 것으로 분석됐다.

한은은 25일 열린 금통위 정례회의에서 경기에 주는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물가 상승을 억제할 방안으로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을 선택했다. 이로써 한은 기준금리는 2.50%로 올라가게 됐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 행보는 금통위 회의 기준으로 4차례 연속 이어졌다. 한은의 기준금리 4회 연속 인상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해 8월 한은 금통위는 1년 3개월 만에 긴축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래 꾸준히 기준금리를 올려왔다. 올해 들어 열린 금통위 회의에서는 지난 2월 회의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매번 기준금리 인상이 단행됐다. 그 중엔 지난 7월의 0.50%포인트 인상도 포함돼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이로써 한은 기준금리는 지난 1년 사이에만 도합 2.00%포인트 상승했다.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물가 상승세가 강했던 것이 가파른 금리 인상의 원인이었다.

한은의 이번 결정은 장기간의 고물가 행진에서 비롯됐다. 국내 소비자물가는 7월 들어 1년 전보다 6.3% 상승했다. 이는 외환위기 기간이었던 1998년 11월의 6.8%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소비자들의 물가전망을 대변하는 기대인플레이션율도 한국은행의 8월 조사에서 4.3%를 기록했다. 전달의 4.7%보다는 다소 하락했지만 향후 1년 동안 물가가 여전히 높은 상승률을 유지할 것이란 생각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물가만 놓고 보면 한은이 이번에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이상 인상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인상 빈도가 높아졌다지만 ‘베이비스텝’으로는 지금의 고물가를 잠재울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 분석이다.

한은으로 하여금 기준금리 대폭 인상을 망설이게 했을 핵심 요소는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은은 이날 ‘베이비스텝’ 결정 배경을 설명하면서 경기 하방 위험의 증대를 거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목표 수준을 크게 웃돌며 오름세를 지속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금리 인상 폭과 속도에 대해서는 “인플레의 지속 정도, 성장 흐름, 자본 유출입을 포함하는 금융안정성, 주요국 통화정책 변화, 지정학적 리스크 등을 면밀히 검토해 판단하겠다”고 설명했다.

한은의 설명을 종합하면 경기 하방 위험성을 일정 부분 고려하면서 가능한 한 무리가 나타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금리 인상폭을 결정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한은이 지금의 템포를 한동안 이어가리라는 점도 금통위의 설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경기 하방 위험에 대한 한은의 경계심은 이날 새로운 기준금리와 함께 발표된 경제전망 수정치와도 연결돼 있다. 이날 한은이 새로 내놓은 올해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6%와 2.1%였다. 5월 전망치(2.7%, 2.4%)보다 각각 0.1%포인트, 0.3%포인트 낮아진 수치다.

기준금리 인상은 가계와 기업이 부담할 금융비용을 증가시킨다. 이는 곧 소비와 투자, 즉 내수 위축을 초래해 경제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그러잖아도 대외 악재들로 인해 수출이 부진한 가운데 내수마저 위축되면 경기는 하방 압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

한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가계대출만 해도 1757조9000억원에 이르렀다. 이중 변동금리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8.1%나 됐다. 가계대출 차주 10명 중 8명 정도가 기준금리 인상의 직접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다. 여기에 자영업자들이 받은 사업자대출(기업대출로 분류됨)까지 더하면 사실상 그 이상의 가계가 기준금리 인상의 영향권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물가 현상이 해소되지 않는 탓에 한은은 당분간 긴축 고삐를 조여야 할 입장에 놓였다. 한은이 이날 발표한 올해와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수정 전망치는 5월의 기존 전망값(4.5%, 2.9%)보다 크게 오른 5.2%, 3.7%였다. 이는 물가가 조만간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절대치 자체는 한동안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임을 시사한다.

최근 들어 원/달러 환율이 심상치 않은 상승흐름을 보이고 있는 점도 한은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치솟는 환율은 수입물가를 끌어올려 높아진 국내 물가를 다시 한 번 자극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과도하게 올라가는 원/달러 환율은 한은의 긴축 고삐를 조이는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도 한은의 긴축 행보를 재촉하는 요인 중 하나다. 이날 금통위 결정으로 한국과 미국(2.25~2.50%)의 기준금리는 상단 높이가 같아졌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다음 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최소 0.50%포인트 인상할 가능성이 높아 균형은 다시 무너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우리보다 높아지는 현상인 ‘금리역전’은 연말로 갈수록 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연준이 ‘빅스텝’(0.50%포인트 인상)과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인상)을 놓고 고민하는 것과 달리 한은은 연말까지 ‘베이비스텝’을 취할 가능성이 유력시되고 있어서이다. 금리역전 폭이 커지고, 그 상태가 길게 이어지는 것은 우리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다. 외화자본이 언제든 썰물처럼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시장 전반을 지배하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한은이 올해 남은 두 차례 금통위 회의에서 제반 여건상 한 번만 금리 인상을 결정할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물가만 바라보고 긴축을 강행해도 좋을 만큼 경제 상황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그 같은 분석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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