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조기업들의 재고지수가 26년 만에 최대폭 증가했다. 급증하는 기업재고가 대외변수에 따른 일시적 조정이 아닌 본격적 경기침체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기회복을 기대하고 생산량을 늘렸으나 소비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는 바람에 재고만 쌓이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재고 증가가 지속되면 기업들이 공장가동률을 낮춰 유휴인력이 발생하고, 고용과 신규투자가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경기 하강기에 접어들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내놓은 ‘기업활동으로 본 최근 경기상황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산업활동 동향의 제조업 재고지수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18.0% 증가했다. 지난해 2분기 -4.2%를 기록한 이후 3분기(4.2%), 4분기(11.4%), 올해 1분기(13.4%)에 이어 4분기 연속 상승한 것이다. 분기별 수치로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2분기(22.0%) 이후 26년 만의 최대 증가폭이다. 

재고지수는 경기예측을 위한 주요 경제지표 중 하나로, 기업이 보유한 제품 재고량의 변동을 지수화해 그 증감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한 수치다. 기업 재고는 일반적으로 경기변동에 따라 조절이 이뤄지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지난해 2분기를 저점으로 1년 간(4개 분기) 오름세를 보였다. 대한상의는 “기업 재고지수가 장기간 오르는 것은 2017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이라고 밝혔다.

[사진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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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기업의 재고지수 증감률이 지난해 2분기 -6.4%에서 올해 2분기 22.0%로 치솟았다. 대한상의가 한국평가데이터에 의뢰해 분기마다 재무제표를 공시하는 제조업체 상장기업(1400여 곳)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대기업의 재고자산은 지난해 2분기 61조4770억원에서 올해 2분기 89조1030억원으로 증가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6월말 재고자산은 모두 52조922억원으로 지난해 말(41조3844억원)보다 10조7000억원이나 늘어났다. 같은 기간 중소기업의 재고지수 증감률은 1.2%에서 7.0%로 상대적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중소기업 재고자산도 7조4370억원에서 9조5010억원으로 점진적으로 늘어났다.

제조업 전체로 보면 2분기 재고자산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9.7% 증가했다. 업종별로는 ‘비금속 광물제품’(79.7%), ‘코크스·연탄 및 석유정제품’(64.2%),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58.1%), ‘1차 금속’(56.7%) 등의 재고자산 증가율이 높게 나타났다. 재고자산 물량이 가장 많은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의 경우 전체 제조업 재고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년 2분기 24.7%에서 올해 2분기 27.9%로 확대됐다.

기업재고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코로나19가 잦아들면서 기업들이 생산을 늘린 까닭이다. 국제유가·원자재가격 급등에 대응해 원자재를 초과 확보해 제품 생산에 투입했지만 글로벌 공급망 차질로 인해 제품 출하가 늦어진 점도 재고 증가의 원인으로 꼽힌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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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경상남도 소재 석유정제업체 A사의 경우 최근 늘어나는 재고 때문에 채산성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정제마진 회복으로 큰 영업이익을 기록했던 A사는 유가상승에 대비하기 위해 원유 구매량을 늘리고 설비가동률도 높이는 등 경기회복에 대비해왔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 이후 경기침체 위험이 커지면서 수요가 줄어드는 바람에 재고가 급증했다. A사 경영지원팀장은 “유가 상승에 대비한다고 선제적으로 원유 구매량을 늘린 게 오히려 독이 됐다”며 “재고는 느는데 수요는 좀처럼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올해 매출 목표 달성은 물론이고 영업이익을 흑자로 가져갈 수 있을지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수요 위축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인플레이션 등에 기인한다. 수요가 탄탄히 받쳐주면 재고도 빠르게 소진될 수 있지만 상황은 정 반대로 전개되고 있다. 제조업 출하 감소폭이 생산 감소폭보다 더 커 생산과 출하 간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판매(출하)가 줄어들면 제품이 쌓이고(재고), 기업들이 이에 맞춰 생산을 감소시켜 생산-출하가 비슷한 추세를 보이는 일반적인 현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수요 위축을 반영하듯 제조업 생산지수와 출하지수는 4개 분기 연속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수출증가율이 둔화하고 무역적자가 심화하는 데다 고물가와 금리인상으로 내수 진작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기업재고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생산이 급감할 경우 경기 급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하반기 정책당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라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3분기(7~9월)부터는 생산 감소가 본격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대한상의는 전망했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는 “재고가 쌓인다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는 돈의 회전이 안 된다는 것”이라며 “기업들이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고 생산을 줄이면 그만큼 인력도 덜 필요해 결국 고용시장에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상당수 기업은 올해 채용 및 시설투자를 재검토하거나 보류하고 있다. 경기도 중소도시에 있는 통신기기 부품업체 B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재고가 급증해 공장 내부에 더 이상 적재할 공간이 없어 주변 창고까지 임차했다. B사 대표는 “공장가동률을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였고, 조만간 더 줄일 예정”이라며 “진행 중인 수출계약이 불발되면 4분기 무급휴직에 들어가야 한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강석구 본부장은 “하반기 경기 급락에 대응하기 위해 가용 가능한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며 “정부가 최근 무역수지 개선, 중장기 수출경쟁력 강화 지원 등 수출종합전략을 발표한 만큼 이를 조속히 실행에 옮기는 한편 코세페(코리아 세일 페스타)·동행세일 등 내수 진작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반기 중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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