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화폐거래소에서 은행을 거쳐 해외로 빠져나간 수상한 외화송금 규모가 10조원을 넘어섰다. 외화송금이 이뤄진 곳도 신한·우리은행 외에 의심사례가 포착된 10개 은행이 추가되는 바람에 12개 은행으로 늘어났다. 이들 은행에 대한 외화송금 검사를 다음 달 마무리할 예정인 만큼 앞으로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2일 은행권 외화송금 검사 중간결과를 발표하고 검사과정에서 확인된 수상한 외화송금 혐의업체 82개사, 이들 업체의 외화송금액 72억2000만 달러(약 10조1000억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규모는 금감원이 대대적인 은행권 추가검사를 착수하기 전인 지난달 14일 중간발표 결과(65개사, 65억4000만 달러)보다 혐의업체는 17개사, 송금액은 6억8000만 달러 늘어난 수치다.

특히 수상한 외화송금 규모는 금감원이 중간결과를 발표할 때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신한·우리은행은 지난 6월 처음으로 20억2000만 달러 규모의 수상한 외화송금 거래를 금감원에 보고했다. 이에 금감원은 전 은행권에 자체검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이어 7월 금감원은 은행권 자체검사를 토대로 의심사례가 파악된 KB국민·하나·SC제일·NH농협·IBK기업·수협·부산·대구·광주·경남은행 등 10개 은행을 추가해 12개 은행을 대상으로 검사에 착수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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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외화송금 규모는 33억7000만 달러로 증가했다. 지난달에는 모든 은행권으로 조사범위를 확대해 검사한 결과 수상한 외화송금 거래액이 65억4000만 달러로 다시 늘어났다고 공표했다. 이번에 은행별로 혐의업체를 교차검증하는 등 추가 검사를 실시한 결과 외화송금액이 72억2000만 달러로 불어난 것이다. 아직 검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모는 더 커질 공산이 크다.

은행별 수상한 외화송금 규모는 신한(23억6000만 달러)과 우리(16억2000만 달러)가 가장 컸다. 하나(10억8000만 달러), KB국민(7억5000만 달러), NH농협(6억4000만 달러), SC제일(3억2000만 달러), IBK기업(3억 달러), 수협(7000만 달러), 부산(6000만 달러), 경남(1000만 달러), 대구(1000만 달러), 광주은행(500만 달러)에서도 외화송금 거래가 확인됐다.

외화송금 혐의업체도 65개사에서 82개사로 증가했다. 송금업체의 업종은 상품종합 중개·도매업 18개(22.0%), 여행사업 등 여행 관련업 16개(19.5%), 화장품·화장용품 도매업 10개(12.2%) 등이다. 82개사 중 3억 달러 이상 송금한 업체는 5개사였다. 이밖에 11개사가 1억~3억 달러, 21개사가 5000만~1억 달러, 45개사가 5000만 달러 이하를 송금했다. 금감원은 적발한 혐의업체 정보를 검찰·관세청과 공유해 외환거래법 위반 등 위법 여부를 가리기로 했다.

수상한 외화송금은 대부분 국내 가상화폐거래소와 은행을 거쳐 이뤄진 까닭에 국내외 가상화폐 간의 시세차익, 이른바 ‘김치프리미엄’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국내 가상화폐 가격이 비싼 점을 이용해 외국에서 가상화폐를 구입해 국내로 옮겨 판매한 뒤 다시 외화를 해외로 빼돌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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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파악된 수상한 외화송금 역시 앞서 발견된 신한·우리은행의 사례와 구조가 비슷했다. 국내 가상화폐거래소에서 가상화폐를 원화로 바꿔 유령업체의 국내 은행계좌로 이체한 뒤 외화를 무역대금으로 위장해 해외계좌로 송금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국내 가상화폐거래소에서 돈을 빼낸 후 무역회사로 가장한 위장법인을 거쳐 해외법인으로 돈을 송금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해외법인 중 1개 회사는 지급결제 업체인 것으로 드러났다. 수출입 거래명목으로 돈을 보냈는데, 수출입과 전혀 무관한 지급결제 회사가 돈을 받은 것이다.

적발된 위장 무역회사 중 절반 이상은 2개 이상 은행을 통해 해외로 송금한 것으로 파악됐다. 82개 혐의업체 중 1개 은행에서 송금한 업체는 40곳이다. 30개 업체는 2개 은행을 이용했으며, 3~4개 은행을 통해 돈을 보낸 업체는 12곳이다. 복수 은행을 이용한 업체들은 적발을 피하기 위해 일정기간 동안 한 은행을 이용했다가 다른 은행으로 갈아탄 것으로 보인다.

외화송금된 자금의 대부분은 홍콩으로 향했다. 자금의 71.8%(51억8000만 달러)가 홍콩으로 보내졌으며 일본 15.3%(11억 달러), 중국에 5.0%(3억6000만 달러)가 각각 송금됐다. 송금 통화는 미국 달러화 81.8%(59억 달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 엔화는 15.1%(10억9000만 달러), 홍콩달러화는 3.1%(2억3000만 달러) 등이었다.

더욱이 우리은행 직원은 외화송금 과정에 적극 개입한 정황도 포착했다. 기업이 외화송금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신청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송금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우리은행 직원이 해당 서류작성을 도와줬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기업이 외화송금을 하기 위해서는 은행에서 업종·금액·거래용도 등이 담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금감원 검사결과 해당 업체는 당초 외화송금이 불가능했으나 우리은행 직원의 서류수정으로 가능해졌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의 대규모 외환송금으로 은행지점은 막대한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며 “기업 외환송금 수수료율은 0.15~0.16%밖에 되지 않지만 송금액이 조(兆) 단위에 달하는 만큼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대구지검 반부패수사부는 지난 21일 우리은행 본점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하고 이 은행 직원을 조사하고 있다. 우리은행 직원은 검찰 수사과정을 해당 업체에 알렸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금감원은 “은행 직원 개인의 형사처벌 외에 금감원의 검사결과에 따른 제재도 엄정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12개 은행에 대한 검사를 오는 10월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금감원은 “자금흐름 추적 등을 통해 외화송금 거래의 실체를 확인하고, 은행의 관련 법령 준수여부 등을 점검 중”이라며 “검사 결과 외국환업무 취급 등 관련 준수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은행에 대해서는 엄중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전문위원(전 서울신문 선임기자·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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