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여야가 정기국회 회기를 넘긴지 십 수 일이 지나도록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미루고 있다. 여·야 대립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이없게도 5억원 남짓한 행정안전부 경찰국 및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의 운영예산이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관련 예산 항목을 따로 두는 것을 인정치 않으면서 대신 예비비를 끌어다 쓰라고 정부·여당에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여당인 국민의힘으로서는 명분상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방안이다. 윤석열 정부가 나름의 국정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신설한 두 조직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어서이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관련법 시행령을 개정함으로써 경찰국과 인사정보관리단을 신설했다. 과거 청와대의 민정수석실을 폐지한 데 따라 생긴 행정 공백을 메우려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정기국회가 진행되는 동안만 해도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의 기 싸움이 법정시한은 물론이고 정기국회 회기 종료일 이후까지 이어지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전망의 중요한 논거로 작용한 것 중 하나가 의원들 각자의 쪽지예산이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의원들이 각자의 쪽지예산을 편성(?)한 채 예산결산위원회 계수조정소위원회 진행 중 자기 당 위원들에게 슬쩍 쪽지예산을 건네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낙관론의 배경이었다.

국민의힘 주호영(왼쪽),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  [사진 = 연합뉴스]
국민의힘 주호영(왼쪽),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 [사진 = 연합뉴스]

쪽지예산이란 의원 개개인이 지역구 민원사업이나 상임위 활동과 관련한 사업에 예산이 배정 또는 추가 배정되도록 하기 위해 들이미는 예산을 지칭한다. 대개 예산안 심사 막판 단계인 계수조정소위에 자신의 요구를 담은 내용을 쪽지에 적어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법정 용어는 아니지만 언론이 의원들의 민원성 예산 끼워넣기를 비판하려는 취지로 오래 전부터 쪽지예산이란 이름을 사용해왔다.

쪽지예산의 개념을 두고는 가끔 논쟁이 빚어지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예산 당국인 기획재정부가 쪽지예산 주문이 김영란법상 부정청탁에 해당한다며 경계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당시 기재부는 쪽지예산의 개념으로 ‘공식적인 국회 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재부 예산실에 개별적으로 요구하는 예산’이란 취지의 내용을 정리한 바 있다.

기재부가 말하는 쪽지예산은 예결위 소위의 심사책자에 반영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같은 기재부 나름의 기준은 국회 상임위나 각 소위에서 논의를 거쳐 결론이 난 모든 사업은 예결위 소위 심사책자에 반영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언론이 규정하는 쪽지예산과의 뚜렷한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언론이 말하는 쪽지예산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정부의 예산안 초안에 담겨 있지 않은 모든 예산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재부 정의대로라면, 상임위나 예결위, 또는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논의 과정에서 쪽지로 전달돼 추가되는 의원들의 예산은 쪽지예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기재부의 개념 정의는 비판의 대상이었던 관행적 쪽지예산 전달 행위를 정부가 앞장서서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악수하는 박홍근(왼쪽), 주호영 원내대표. [사진 = 연합뉴스]
악수하는 더불어민주당 박홍근(왼쪽),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 [사진 = 연합뉴스]

기재부의 행위를 달리 이해하자면 국회 본회의 통과 이후에도 국회의원들이 예산실로 얼마나 많이 예산 관련 민원을 넣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워낙 발생 빈도가 높다 보니 기재부가 쪽지예산에 대한 해석을 넓게 내리면서까지, 과도한 압력을 차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재부의 쪽지예산 경계령이 내려지기 전 국민권익위원회는 쪽지예산 요구 행위가 법령 위반이 아니라고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국민권익위는 김영란법 시행 주무기관이라는 점에서 이 유권해석은 구속력을 갖는다. 다만, 유권해석의 주 내용이 ‘쪽지예산의 이유가 공익적인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 민원을 전달하는 행위이므로 부정청탁에 해당하지 않는다’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권익위 유권해석을 두고는 혼선만 키웠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기재부의 경계령에도 불구하고 이후 의원들의 쪽지예산 끼워넣기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기재부가 의원들의 쪽지예산 끼워넣기를 미리 상정해 국고채 이자 예산을 부풀려 국회에 제출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 같은 지적은 지난해 예산국회 때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으로부터 제기됐다.

의도적으로 부풀려 제출된 국고채 이자 예산을 삭감하게 되면, 국회로서는 예산 삭감 노력을 열심히 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삭감분만큼 다른 분야의 예산을 증액할 여지를 갖게 돼 의원들은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효과는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다. 용혜인 의원이 궁극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도 이 점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여·야의 첨예한 대립 탓에 더불어민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삭감예산이 내년도 예산으로 확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여당과의 협의를 거쳐 정부의 동의를 얻지 않는 한 예산 증액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그 이유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수 의원이 호시탐탐 별러왔을 쪽지예산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 까닭에 민주당 내부에서도 의원들, 특히 지역구 의원 각자가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