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사면(특사·特赦)을 둘러싼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이 볼만했다. 명단 발표 전부터 빚 독촉하듯 사면 내용을 제시하는 촌극이 벌어지더니 결과를 두고 또 티격태격이었다. 한쪽은 ‘범국민적 통합’을 주장했지만 다른 한 쪽에선 ‘갈라치기 사면’이니 ‘내편 챙기기 사면’이니 하는 볼멘소리와 독설을 쏟아냈다. 여·야, 좌·우 가를 것 없이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역겨운 행동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진영별로 묻지마식 팬덤에 기대어 철면피한 행동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우세스럽기 짝이 없는 악다구니 소동은 진작부터 예상됐었다. 그랬던 만큼 특사를 굳이 강행한 측도 딱하고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과정으로 보나 결과로 보나 사면을 왜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이다. 명분도 없이 잡음만 요란한 특사를 상식과 공정의 가치를 그토록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가 강행했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특별사면은 ‘법대로’를 강조하며 상식·정의를 대표 브랜드로 내세운 윤석열 정부엔 애시당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지은 죄 만큼 처벌하는 게 상식이고 공정이라면 권력과의 거리를 따져가며 선별한 범법자들에게 죄업을 면해주는 일은 원칙적으로 몰상식이자 불공정일 수밖에 없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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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과 무관한 장삼이사들 입장에서 보자면 특사는 어떤 명분을 갖다 붙인다 해도 그저 세력가들의 특혜 놀음에 불과하다. 기계적 균형으로 포장한 채 자기 편 챙기기를 하는 쪽이나, 제 식구 덜 챙겨주었다고 흥분하는 쪽이나 꼴사납기는 매 한가지다.

특사로 인해 여·야 갈등이 더 심해진 것만 봐도 국민통합은 거짓 명분임을 알 수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이명박 전 대통령(MB), 김경수 전 경남지사를 사면하는데 반대한다는 여론이 우세했다는 점도 국민통합이 억지 명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지난달 12~14일 실시된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여론조사 결과 두 사람에 대한 특별사면 반대 응답률은 각각 53%, 51%였다(세부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피 참조).

윤석열 대통령이 여의도의 정치 논리에서 탈피해 진정으로 ‘법대로’를 실천하려 했다면 이런 특사는 하지 않는 게 옳았다. 특사는 본질적으로 윤 대통령이 강조해온 상식·공정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는 취임 후 첫 번째 국정목표로 ‘상식이 회복된 반듯한 나라’를 제시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설정한 15개 국정과제 중 하나가 ‘공정한 법집행’이다.

이번 사면은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듯 일반인들의 상식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면 내용부터가 구태의연했다. 으레 그랬듯 다수의 조연 및 단역들을 동원한 가운데 소수 주연급 인사들에게 은전을 베푸는 사면에 불과했다. 주연급은 9명의 정치인과 66명의 공직자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1000여명의 그렇고 그런 선거사범 등이 조역 및 단역으로 동원됐다. 그 결과 그야말로 감동 없는 사면이 되어버렸다. 민생 배제가 가장 큰 원인이다.

민생이 빠진 자리를 꽉꽉 채운 것은 정치였다. 그 바람에 이번 특사는 가장 정치적인 사면이란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됐다. 정치인들의 명단이 기계적 균형을 맞춰가며 작성된 흔적이 뚜렷하다는 점도 그 같은 평가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9명의 사면 대상 정치인 중 전직 대통령인 MB를 제외하고 나면 여·야 인사는 사이좋게 4대 4 동수를 이룬다. 하지만 그마저 겉포장에 불과했다. 포장을 풀고 수혜자 면면을 들여다보면 국정농단 사건 연루자를 포함한 다수가 여권 인사들이다. 심지어 불과 2개월 전 유죄 확정을 받은 현직 대통령실 참모도 버젓이 특사 명단에 포함돼 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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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여·야 균형을 꼼꼼히 맞춰가며 야당 측을 배려한다 할지라도 특별사면은 본디 공정이나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제도다. 특사가 결국은 대상자들에게 선별적 특혜를 누리도록 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특히 감동마저 없는 특사라면 사면권 남용이라는 시비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결국 청산돼야 할 제왕적 대통령제의 묵은 잔재라는 비판만 남게 된다. 이번 사면을 두고는 이미 그 같은 비판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통령의 초월적 권리라 할 특별사면권은 속성상 사법정의와 삼권분립 정신을 훼손할 개연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사법부의 결정을 대통령이 국회 동의 절차도 없이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근본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대통령 특별사면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법적 대응 능력이 취약한 사람들의 과도한 죄업을 덜어주려는 게 그 이유다. 사법제도의 결핍을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대통령 특별사면 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엄혹하기만 한 사법부의 판단에 때로 온정을 불어넣는 수단으로 기능할 때 특별사면 제도는 비로소 소임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사 제도의 존재 이유로는 ‘국민통합’을 들 수 있다. 특사가 가치관의 차이나 개인적 호오에서 비롯된 정치적 갈등을 완화하거나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옹호론의 논리적 배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사 속의 특사는 대개 권력자 주변의 인물들에게 특혜를 베푸는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 개중엔 ‘경제’와 ‘민생’을 키워드로 끼워 넣어 감동을 연출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하지만 특사의 핵심 대상은 대개 권력자의 측근 등 세도가들이었다. 실제로는 사면의 혜택을 세력가들끼리 주고받거나 번갈아 독식하는, 그들만의 특혜 잔치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행태가 반복되면서 죄를 지은 정치인·관료들 사이에선 은연중 자신들도 종국엔 특사의 대상이 될 것이란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혜를 당연시하는 무의식적 성향이 고착화됐다는 얘기다. 피에르 부르뒤에 등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아비투스’가 그들의 심리 속에 굳은살처럼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펼쳐지는 정치인·관료들의 낯 두꺼운 특사 잔치도 과거의 양반의식처럼 그들 사이에 문화적 DNA로 심어진 특권의식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같은 해석이 아니고서는 파렴치한 중죄인이 사면으로 죄업을 털어낸 뒤 정치적 탄압을 받은 듯 행동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특혜성 사면이 반복된 탓에 특별사면 제도를 없애는 게 상책이겠다는 생각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마저 지난한 헌법 개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보니, 번번이 그들끼리의 이전투구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일반시민들은 하릴없이 화병만 키워야 할 판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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