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세계는 지금 반도체 전쟁중

②-1 주요국 반도체 산업 동향: 대만

②-2 주요국 반도체 산업 동향: 미국

②-3 주요국 반도체 산업 동향: 일본

②-4 주요국 반도체 산업 동향: 중국

③ 여전히 불투명한 한국의 미래 전략

 

[나이스경제 = 최진우 기자] 일본 사람들에게 반도체 산업은 회한이 서린 ‘아픈 손가락’이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세계 1위였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위상이 미국의 연이은 견제로 흔들리기 시작해 이젠 시장 점유율에서 한국·대만에 밀리게 됐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두 차례의 미·일반도체협정이었다. 1986년과 1991년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 및 기업들을 대상으로 체결한 협정 탓에 일본 반도체 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미국으로의 반도체 덤핑 수출이 금지되고, 자국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마저 불가능해진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최근 들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재도약 시도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과의 협력을 매개로 하고 있다. 미국 정부와 손잡고 반도체 공급망 확충을 위한 가치사슬을 형성하는데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혼란과 미·중 갈등의 와중에 주요국 기술산업이 애로를 겪게 된 것이 일본의 위기감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서의 옛날 영화를 되찾으려는 잠재된 의지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만의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반도체 생산공장. [사진 = 교도/연합뉴스]
대만의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반도체 생산공장. [사진 = 교도/연합뉴스]

일본은 지난해 7월 워싱턴에서 미·일 외교·상무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2+2 경제대화’를 발족시켰다. 이 기구에는 미국의 국무장관과 상무장관, 일본의 외무상과 경제산업상(경산상)이 참석한다. 각종 경제안보 현안을 논의하려는 게 주된 목적이다.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견제도 기구 운영의 목적 중 하나다.

여기서 다룰 경제 현안 중에서도 핵심 주제는 반도체다. 두 나라는 첫 모임에서부터 반도체와 배터리, 필수광물 등 전략 품목에 대한 공급망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눈길을 끈 점은 두 나라가 이 기구를 통해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센터를 일본에 건립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반도체 장비·소재에 대한 강점을 기반 삼아 미국과 협력하면서 반도체 설계와 기술개발의 노하우를 얻으려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은 대만·미국 반도체 기업들과의 협력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외국 기업들과의 협력은 직접적인 공급망 확충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대만이 국내외 투자 확대로 생산을 늘리는데 치중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행태를 보여왔다. 그 노력의 하나가 해외 반도체 기업의 자국 내 투자 유치 및 증대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다. 대상은 파운드리 최강자인 대만의 TSMC와 미국 반도체 회사들인 마이크론, 웨스턴디지털 등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에 투자하는 이들 해외 기업들에게 각종 당근책을 제시하고 있다.

TSMC는 일본을 대표하는 소니그룹 및 덴소와 손잡고 구마모토현 기쿠요마치에 반도체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이 공장의 가동 목표 시점은 2024년 말이다. 일본 정부는 TSMC의 일본 내 첫 번째 생산시설인 이 공장 건설에 4760억엔(약 4조5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전체 투자 규모 1조1000억엔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보조금으로 준다는 것이다. 직접적 목적은 최근 들어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는 시스템반도체에 대한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다. TSMC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신 구마모토 공장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를 도요타 등 일본 제조기업들에게 우선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일본 정부는 TSMC가 지난해 6월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설립한 반도체 연구개발센터에도 사업비 절반(190억엔)을 지원했다.

TSMC의 일본내 제2 공장 건설 구상도 무르익고 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TSMC의 웨이저자 최고경영자는 얼마 전 2022년 4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일본 내 반도체 수요가 충분하고, 일본 정부가 적절한 지원만 해준다면 공장을 추가로 지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일본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발언이 전해진 다음날인 지난 13일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산상은 “대단히 환영한다”며 “어떤 지원이 가능할지 생각해 보겠다”고 화답했다.

[사진 = EPA/연합뉴스]
[사진 = EPA/연합뉴스]

일본 정부는 자국 반도체 기업 키옥시아가 미국의 웨스턴디지털과 함께 이와테현에 짓고 있는 낸드 플래시 반도체 공장 건설에도 투자금의 3분의 1 정도를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액은 929억엔(약 8813억원)이다.

일본 정부는 악연을 지닌 미국 마이크론과의 협력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인 마이크론은 지난 시절 특허 침해를 주장하며 일본 기업들을 미 무역대표부(USTR)에 제소했던 곳이다. 당시 제소는 미·일반도체협정 체결의 빌미가 됐다. 일본 정부는 최근 마이크론의 히로시마 D램 공장 증설을 위한 투자에도 3억2000만 달러(약 3949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일본 기업끼리의 연합전선도 구축됐다. 일본의 주요 대기업 8개사는 작년 11월 자본을 갹출해 ‘라피더스(Rapidus)’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차세대 반도체 생산이 목적이다. 참여 기업은 토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키옥시아, NTT, NEC, 덴소, 미쓰비시 UFJ은행 등이다.

일본 정부도 라피더스 설립에 700억엔(약 664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라피더스는 2027년부터 2nm급 비메모리 반도체를 양산한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히가시 데쓰로 전 도쿄일렉트론 회장이 초대 회장을, 고이케 아쓰요시 전 웨스턴디지털 일본법인 사장이 초대 사장을 맡기로 했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산업 지원·육성은 지난해 5월 제정된 경제안보법을 토대로 이뤄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작년 12월 국회연설을 통해 향후 10년 동안 민·관이 힘을 합쳐 10조엔(약 94조7000억원) 규모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본 정부의 궁극적 노림수는 미국과 연대해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적으로 확충함으로써 반도체 공급 1, 2위 국가들인 한국·대만으로부터의 수입 의존도를 줄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한 발 더 나아가서는 미국 외에 대만까지를 함께 엮어 3국 중심의 밸류체인을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미국이 한국·대만을 염두에 두고 추진하는 ‘칩4’ 동맹에도 큰 관심을 내보이고 있다. ‘미국·일본’, ‘미국·대만·일본’의 밸류체인에 이어 ‘한국·미국·대만·일본’ 4국의 반도체 동맹결성에까지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2중, 3중의 안전망을 짜놓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일본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0%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조사업체들이 발표하는 반도체 매출 순위에서 일본 기업들은 ‘톱10’에 드는 경우가 많지 않다. 특히 파운드리나 팹리스 부문의 경우 일본 기업들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파운드리는 TSMC와 UMC를 앞세운 대만과 한국(삼성전자)·중국(SMIC와 화홍그룹 등)이, 팹리스는 미국·대만이 ‘톱10’을 장악하고 있다. 실질적 점유율 면에서 보면 파운드리는 TSMC가, 팹리스는 퀄컴과 엔비디아를 필두로 하는 미국 기업들이 사실상 시장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각국 정부의 움직임을 비교·분석하자면 조만간 일본 기업들의 도약이 두드러질 것이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본은 한때 적기 투자의 기회를 놓쳐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렸지만, 여전히 저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 나라다. 최근 산업연구원(KIET)이 2021년 반도체 산업의 종합경쟁력을 분석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78)의 순위는 미국(96)·대만(79) 다음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 다음 순위는 중국(74)·한국(71)·유럽연합(EU·66) 등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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