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주화 항쟁 이전에 설립된 한 신문사의 사사(社史)를 읽다가 흥미로운 기록들을 접한 적이 있다. 사사에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 자사 신문이 정간(停刊) 당한 일들까지 세세히 정리돼 있었다. 그 당시 신문사들은 며칠씩 간행 정지를 당하곤 했다.

정간 이유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이없는 일로 정간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통령’을 ‘대령’으로, ‘여사’를 ‘여시’로 잘못 표기한 채 신문을 발행했다가 당국으로부터 치도곤을 맞곤 했다. 한자 표기가 일반화돼 있었던 까닭에 ‘대통령’의 ‘대(大)’자가 ‘태(太)’자로 잘못 인쇄돼 신문 발행이 이뤄진 사례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런 유의 실수는 식자공이 시간에 쫓기며 납 활자를 하나하나 심다 보니 심심찮게 일어났던 것 같다.

이런 실수가 정간 조치로 이어지는 일이 생기곤 하자 신문사들은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했었다고 한다. ‘대통령’ 또는 ‘大統領’처럼 특별히 민감한(?) 단어의 경우 여러 글자를 한 덩어리의 납 활자로 제작해두었다가 통째로 식자(植字)하는 방법을 썼다는 것이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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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다룰 때는 가능한 한 가슴까지 나오도록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이어져 내려온다. ‘존엄하신 분’의 사진인데 목을 자르듯 사진을 트리밍하는 게 불경으로 인식될까 우려한 결과였다.

이런 일들은 이제 신문사들의 사사 또는 원로들의 전언을 통해서나 알 수 있는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그 분수령이 된 것이 1987년 민주화 항쟁이었다. 그 이전 독재자가 군림하던 시절, 거리에서 흔히 들린 구호가 ‘독재 타도’였다. 제도권 언론에서는 ‘독재’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돼 있었지만 대학가에서만큼은 자주 들을 수 있는 구호였다.

당시 그 구호를 외친 주역들이 소위 386 세대들이다. 지금은 어느덧 50대 끝 무렵 또는 60대 초에 도달해 586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당시 그들의 구호에는 울림이 있었다. 보는 이들에게 구호가 주는 짜릿한 쾌감과 독재 정치에서 비롯된 불유쾌한 감정의 배설을 잠시나마 느끼게 해주는 효과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만큼이나 먼 과거의 일이 돼버렸다. 586들이 민주화 투쟁 경력을 앞세워 우리 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자리잡은 세월만 해도 얼추 30년이 돼간다. 그런데도 아직 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걸까. 더불어민주당은 요즈음 들어 다시 ‘독재’란 말을 자주 구사한다.

요 며칠 사이에는 ‘독재’ 앞에 붙은 수사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검찰독재’ 대신 ‘검사독재’란 다소 생소한 단어가 민주당 관계자들 입에서 자주 튀어나왔다. 이재명 대표가 ‘윤석열 검사독재’란 말을 창조하자 같은 당 소속 의원들이 복창하듯 그 표현을 경쟁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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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표는 지난 1월 28일 서울중앙지검에 대장동 사건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면서 ‘검사독재’라는 말을 사용했다. 아마도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대표는 지난달 16일 당 최고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도 ‘검사독재’라는 말을 반복했다. ‘검찰을 앞세워 독재를 한다’(검찰독재)는 기존 주장을 넘어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처럼 행동하며 독재를 한다’(윤석열 검사독재)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표현이었다. 윤 대통령에 대한 직접 공격의 성격이 더 강해진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민주당은 지난달 중순 무렵 국회 본청 앞에 모여 ‘윤석열 검사독재 정권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당 대표와 의원들 외에 보좌진, 당직자, 원외 당협위원장 등까지 가세해 ‘독재’ 정권과의 전면전을 다짐 또는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당일 규탄대회에서는 ‘독재자 단죄’ 등의 구호가 터져나왔다.

반향은 시큰둥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대통령을 독재자로 칭하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인지는 민주당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상황 전개가 여의치 않아 불안감이 커진 탓인지 이 대표의 언설은 나날이 거칠어지고 있다.

급기야 현직 대통령을 ‘깡패’라 부르는 전대미문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난달 22일 국회에서 진행된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당시 이 대표는 “국가 권력을 가지고 장난하면 그게 깡패지 대통령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기자의 물음에 답하며 한 발언에 빗댄 표현이지만 사실상 대통령을 ‘깡패’로 지칭한 셈이다.

이 대표는 기자 간담회 등을 통해 집권 세력을 ‘강도’나 ‘오랑캐’ 등으로 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강도나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방어용 담장을 칠 필요가 있다는 말로 들렸다. 검찰 수사와 관련해 국회와 정당을 방탄 용도로 사용한다는 비판이 일자 대항논리를 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특권 폐지를 지지한다던 자신의 과거 발언을 의식해 이런 논리를 개발한 것으로 분석된다.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피하려다 보니 검찰 수사를 부당한 권력 행사로 몰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 한 술 더 떠 ‘독재’란 말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면 마치 불의에 맞서다 정치 보복을 당하는 것처럼 약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대표의 이런 전략은 비논리적이다. ‘윤석열 정권 = 독재 정권’이란 기본전제부터가 잘못됐다. 대통령을 ‘깡패’라 부를 수 있고, 그런 발언이 매체에 가감 없이 소개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존엄’한 권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 대표에 대한 수사가 독재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은 체포동의안에 찬성하는 국회의원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됐다. 의결 정족수 미달로 체포동의안은 법적으로 부결됐지만 정치적 의미는 가결이었다. 국회 표결 결과는 이 대표 체포와 관련한 여론조사 결과와도 부합했다. 이로써 이 대표가 엮고 있는 정치 탄압 프레임은 약발을 잃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이 대표의 최근 행동은 민주화를 이룬 나라에서 뒤늦게 민주화 운동가 행세를 하고 있는 꼴에 다름 아니다. 이 대표가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입법권력의 중심에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독재’ 운운은 나가도 너무 나간 표현이 아닌가 싶다. 정말 억울하다고 느낀다면 소속 당 의원들부터 설복시킬, 좀 더 그럴 듯한 대항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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