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단 한숨 돌릴 시간을 얻게 됐다. 미국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완화된 반도체 관련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을 제시한데 따른 것이다.

21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는 자국의 칩스법(CHIPS ACT, 반도체과학법)에 의거, 보조금이 국가안보를 저해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가드레일 조항의 세부내용을 공개했다. 이날 관보에 게재된 이들 조항은 60일의 의견수렴을 거쳐 확정된다.

가드레일 조항의 골자는 미국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내 반도체 생산 활동에 제약을 받되 생산능력의 확대 허용 범위를 5% 또는 10% 이내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첨단 반도체의 경우 5% 범위 이내에서, 범용 반도체는 10% 이내에서만 생산능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가드레일 조항은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칩스법 규정(미국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10년 동안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능력의 ‘실질적 확장’을 행하는 ‘중대한 거래’를 할 경우 보조금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을 구체화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간 우리 기업들은 ‘실질적 확장(Material Expansion)’의 의미가 어떻게 규정될지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칩스법에 서명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 = EPA/연합뉴스]
칩스법에 서명하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 = EPA/연합뉴스]

‘실질적 확장’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이날 상무부가 구체화해 내놓은 답은 ‘양적 생산능력 확대’였다. 상무부는 또 ‘중대한 거래’의 의미를 10만 달러 이상의 거래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이 금액 이상의 거래를 할 경우 첨단 반도체는 5%, 범용 반도체는 10% 이내에서만 생산능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미국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도 중국내 공장에서 제한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신규투자를 통해 반도체 생산시설을 증설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 주목되는 내용은 반도체 생산능력을 측정하는 구체적 기준이었다. 이날 제시된 기준은 반도체 제조시설의 경우 ‘월별 웨이퍼 수’, 반도체 패키지 시설의 경우 .‘월별 패키지 수’였다.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을 예로 들면 월별 소요하는 웨이퍼 수량을 10년 간 5% 이내 범위에서 늘린다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로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제한된 범위만 지킨다면 중국 내 공장에서 신규 투자를 이어가며 첨단 반도체 시설을 증설할 수 있게 됐다. 우리 기업들이나 국내 전문가들은 발표된 가드레일 조항 중 이 부분을 가장 반기고 있다.

반도체 생산용 실리콘 원판인 웨이퍼 한 장에서는 여러 개의 반도체가 생산되는데, 기술을 고급화·첨단화할수록 장당 반도체 생산 개수가 늘어난다. 이로써 새로운 돌발 상황이 추가되지 않는 한 삼성전자 등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결정적 지장은 초래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나오고 있다.

미 상무부는 “전체적인 생산능력이 기준 이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보조금 수령 업체가 기술적 업그레이드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규정 내용과 설명 등을 종합하면 실리콘 원판 개수만 5% 이상 늘리지 않는다면 원판 한 장당 첨단 반도체 생산 개수가 몇 배로 늘어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상무부는 이날 범용 반도체와 첨단 반도체를 구분하는 기준도 명확히 밝혔다. 이를테면 로직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일명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28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 메모리 반도체 중 D램은 18nm, 낸드플래시는 128단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로직과 D램은 제시 기준 이상일 때, 낸드플래시는 128단 이내일 경우 범용으로 분류하겠다는 것이다. 로직과 D램은 nm 수치가 낮을수록, 낸드의 경우 쌓아올리는 단수가 높을수록 첨단화된 제품으로 분류된다.

당초 상무부가 대(對)중국 수출 통제를 위해 제시했던 로직 반도체의 범용 기준은 14nm였다. 이 기준은 이번에 28nm로 강화됐다. 14nm 생산공정보다 덜 미세한 공정에서 생산되는 28nm까지를 비범용으로 분류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비교적 구식인 공정에서 생산되는 로직 반도체만 생산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등 우리 기업들은 지금까지 중국내 공장에서 최첨단 수준의 반도체 생산을 자제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술 유출의 위험을 고려한 조치였다. 범용과 최첨단 사이의 중간 수준 반도체 생산에 주력해온 점을 감안하면 우리 기업들은 향후 중국내 공장에서 5%와 10% 제한 조치를 두루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범용과 비범용 분류 기준을 두고 국내 업계에서는 아직 첨단 반도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이날 공개된 기준 이상의 첨단 제품들에 대해 세부 기준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우리가 특히 관심을 두고 있는 영역이 D램은 18nm 미만, 낸드의 경우 128단 이상의 고급공정인 만큼 이 부분에 대해 협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의 반응이다.

공개된 가드레일 규정에 의해 우리 기업들은 중국 내에서 현지 기업들을 상대로 여전히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기술적 업그레이드를 위한 시설 증설의 길이 열렸다는 점이 그 이유다.

이번 가드레일 조항 발표를 두고는 미국이 한국 기업들의 입장을 배려한 측면이 있다는 분석들이 제기된다. 이날 미 상무부도 그동안 파트너 및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 협의 상대국으로 한국·일본·인도·영국 등을 차례로 거론했다. 한국을 제일 앞에 둔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특히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중국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제지할 목적 하에 별도로 실시하고 있는 첨단 장비 반입 규제다. 현재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내 공장 시설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 장비를 들여가도록 미국 정부로부터 포괄적 허가를 받은 상태에 있다. 양국 정부의 협상에 따라 우리 정부에 한시적으로 예외조치가 주어진데 따른 것이다.

1년 기한의 이 조치는 오는 10월이면 효력을 다한다. 현재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간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항구적 예외조치를 허용받기 이전엔 불안감이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된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가 나날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점이 그 이유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집요하게 이뤄지고 있다. 일례로 상무부는 미국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화웨이나 YMTC 등 중국 기업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거나 특허사용 계약 등을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이를 어겨도 지급된 보조금은 어김없이 회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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