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최진우 기자] 한전채가 채권시장의 뇌관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시 등장했다. ‘한전채 블랙홀’이니 ‘한전채 구축효과’니 하는 말들이 언론에 등장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점이 지금의 현실을 대변해준다.

‘한전채 블랙홀’은 한국전력이 발행한 회사채, 일명 한전채가 시장에 다량 쏟아져 나오면서 다른 회사채 등 채권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한전채 구축효과’ 역시 같은 뜻으로 통용된다. 이 말은 한전채가 다른 채권들을 시장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몰아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을 강조할 때 쓰이곤 한다.

이런 현상은 금리 차이에도 별로 개의치 않고 투자자들이 경쟁적으로 한전채를 사들이려 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 여파로 일반 회사채, 심한 경우 비교적 인기가 높은 금융채조차 채권시장에서 외면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때 일반 회사채들은 구입을 유도하기 위해 채권 금리를 크게 올리는 방법을 쓰게 된다. 이는 기업들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비용 부담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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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 금리 상승은 채권가격 하락과 같은 말이다. 채권 가격은 신용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신용도가 낮은 채권일수록 금리가 높아지고, 보유 가치가 낮아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채권 가치가 심하게 내려가다 보면 종국엔 휴지조각이 되기도 한다. 시장 불안이 커질 때는 고율의 금리도 효과를 내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투자자 입장에서는 금리 못지않게 채권의 안전성을 먼저 따져보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전채가 시장에 다량 풀리면 우량기업들조차도 채권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에 실패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한전채 구축효과’는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가 발생한 이후 더욱 뚜렷해지는 양상을 보였었다. 채권시장이 심하게 흔들릴 당시엔 한때나마 한전채조차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는 현상이 나타났었다.

레고랜드 사태가 잦아들고 채권시장도 다시 안정을 회복했지만, ‘한전채 구축효과’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전이 전기를 싸게 공급하느라 적자가 누적됐고, 자금난 해소를 위해 회사채 발행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현재 한전은 발전사로부터 전기를 사들여 시중에 판매하는데, 판매단가를 구입단가의 70%선으로 유지하고 있다. 정부의 압박 때문이다.

한전 적자는 정부가 전기료를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나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여당은 지난달 말 당정협의를 갖고 전기료 및 가스료 인상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당초엔 전기료 및 가스료를 현실화하기로 한 바 있지만, 여당인 국민의힘이 유권자들의 민심 이반을 우려해 요금 인상을 더 미루자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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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한전이 국회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2026년까지 재무상황 개선 목표를 달성하려면 올해에만 전기료를 KWh당 51.6원 올려야 한다. 이런 로드맵에 따라 올해 1분기에는 전기료가 KWh당 13.1원 인상됐다. 앞으로도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려면 매 분기에 그 정도의 전기료 인상이 단행돼야 한다. 하지만 최근 당정협의에 의해 2분기 인상 계획이 보류되기에 이른 것이다.

2분기 전기요금 인상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는 바람에 한전은 향후 더 많은 채권을 발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난해 적자 32조6000억원과 올해 1분기 추정적자 5조원 등을 감당할 길이 없다는 게 한전과 정부의 판단이다. NH투자증권이 예상한 올해 한전의 영업적자 추정치는 12조6000억원이다.

당장 채권을 발행해 적자를 메울 수 있는 기반은 마련돼 있다. 지난해 말 한국전력공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데 따른 것이다. 정치권이 임기응변식으로 마련한 이 방안 덕분에 한전은 한전채 발행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 합’의 6배(기존엔 2배)까지 늘릴 수 있게 됐다. 임의로는 5배까지, 긴급 상황시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승인 하에 6배까지 발행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방안마저 적자 누적으로 적립금을 까먹으면 채권 발행 한도가 자연스레 줄어든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현재 한전의 자본금은 3조원, 적립금은 17조원 정도에 머물러 있다.

설사 한전채를 마구 발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누적되는 이자 부담이 언젠가 전기료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다.

한전 자체 집계에 의하면 지난달 말 현재 한전채 발행잔액은 68조300억원이다. 한전이 채권시장에서 진 빚만 이 정도 규모에 달한다는 의미다. 1년 전인 지난해 3월 말 잔액 39조6200억원에 비하면 72%가량 늘어난 수치다. 한전은 올해 3월까지 다달이 3조2000억원, 2조7000억원, 2조1000억원의 채권을 발행해왔다. 올해 1분기 발행량 소계만 해도 8조100억원에 이른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6조8700억원)보다 17% 정도 증가한 액수다.

과도한 발행이 여러 후유증을 수반하기 마련이지만, 한전채는 시장에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투자 상품이다. 일반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와 달리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함에 따라 안전자산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한전채의 신용등급은 초우량급인 트리플A에 해당한다. 이처럼 신용도 높은 한전채가 지난해 국내 채권시장에 새로 쏟아져나온 채권물량의 45.6%나 됐다. 어지간한 대기업의 회사채조차 경쟁하기 힘든 환경이 채권시장에 형성돼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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