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최진우 기자] 최근 국제 경제외교 무대에서 새롭게 등장한 용어 중 하나가 ‘디리스킹(Derisking)’이다. ‘위험 줄이기’라는 의미의 영어단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단어는 특별히 주목받을 일이 없는 일반명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속에 지구촌이 크게 두 진영으로 갈리면서 중국을 경계하는 의미를 담은 경제외교 용어로 자리하게 됐다. 디리스킹은 중국의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에 맞서려는 서방 진영의 전략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 강압이란 인구 대국인 중국이 자국의 거대 시장을 무기 삼아 다른 나라를 압박한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한국을 상대로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 시스템) 배치 철회를 주장하며 자국민의 한국 단체여행을 금지시키거나 한한령(限韓令: 한류 소비 억제)을 발동한 것 등이 그에 해당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사진 = 연합뉴스 자료사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사진 = 연합뉴스 자료사진]

주목할 점은 디리스킹이 올 봄부터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응하는 서방 진영의 새 전략으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대체하는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주도의 서방국들은 그간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제어하면서 중국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디커플링 전략을 구사해왔다.

국내에서 ‘탈(脫)동조화’로 번역되어 쓰이는 디커플링은 주식시장 등에서 흔히 사용돼온 용어다. 이를테면 평소 동조화 현상을 보여오던 한국과 미국의 증시가 간간이 엇갈린 행보를 보일 때 분석가들은 두 나라 증시가 디커플링 현상을 보인다고 표현하곤 했다.

디커플링은 미·중 갈등 관계와 연결지어 사용될 땐 다른 의미로 수용된다. 이때는 미국 등 서방이 중국을 국제경제 무대에서 섬처럼 고립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해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미국이 첨단기술 유입 차단과 관세장벽 등을 동원해 중국을 강하게 압박한 것도 디커플링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런 전략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바이든 정부는 특히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기술력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치중해왔다. 중국으로 반도체 장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규제를 강화한 것 등이 미국의 그런 의지를 대변해주었다. 그 탓에 중국에 진출해 다량의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조건부 승인 하에 공장 운영을 근근히 이어가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이 미국의 디커플링 전략에 맞서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업체 마이크론을 제재했다. 이로써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새로운 난관을 맞게 됐다. 마이크론이 중국에 공급해온 메모리 반도체를 대신 보충해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내용의 은근한 압력이 미국으로부터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이 한국 정부에 ‘중국이 마이크론의 반도체 판매를 금지할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그 부족분을 채워주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소스는 익명의 소식통이었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미·중 갈등이 나날이 심화되자 유럽연합(EU) 국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류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중국을 지나치게 견제하다가 역풍을 맞아 자국 이익에 손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롭게 등장한 전략 개념이 디리스킹이다.

이 개념엔 중국을 국제경제 무대에서 배제하지 않으면서 단지 중국발(發) 위험 요인을 제거해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이런 전략 개념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으로서 여러 나라와 교역관계를 맺고 있고, 경제의 세계화가 상당 수준으로 진행된 지금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이런 마당에 세계경제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게 EU 등의 판단이다.

대중(對中) 전략과 관련해 디리스킹을 가장 먼저 주창한 인물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다. 그는 지난 3월 말 중국 방문을 앞두고 행한 공식행사 연설에서 디리스킹 개념의 새로운 대중 경제안보 전략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디리스킹 전략은 중국과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하되 과도한 대중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중국발 위험 요소를 줄이도록 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중국과의 관계 단절은 실행 가능하지도, 유럽의 이익에 부합하지도 않는다”며 “중국과의 관계를 끊기보다 위험요소를 없애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제안은 독일·프랑스 등 EU를 주도하는 국가들과 영국·인도·싱가포르 등 많은 나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 결과 마침내 미국조차도 디리스킹 전략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치기에 이르렀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달 말 행한 정책연설을 통해 “우리는 디커플링이 아니라 디리스킹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디리스킹은 탄력적이고 효율적인 공급망을 확보해 특정 국가의 강압에 종속되지 않는 것을 보장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급기야 디리스킹 개념은 지난 21일 폐막된 히로시마 G7(서방선진 7개국)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에도 스며들었다. 성명은 중국에 대한 견제 의지를 밝히면서도 중국과 “건설적이고 안정적 관계를 구축할 용의가 있다”, “우리의 정책접근은 중국을 해치거나 중국의 경제적 발전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도 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한 기자회견에서 중국과의 냉각된 관계가 곧 해빙될 것이라 예고하면서 “우리는 중국을 분리하려는 게 아니라 위험을 제거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디커플링 대신 디리스킹이 전략의 새로운 포인트임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되는 발언이었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이런 행보는 국제무대에서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사실, 겉으론 요란한 싸움을 벌이면서도 막후에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독자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이것이 대중 의존도가 유난히 심한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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