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은 생전에 대한민국 정치를 4류로 평한 바 있다. 1990년대 초 보수 정권 시절에 내놓았던 그 평가는 딱히 특정 진영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보수·진보,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이 3류인 관료들 이상으로 세도를 부리며 2류 정도는 되는 기업들의 발목이나 잡는 저급한 집단임을 강조하고자 한 발언이었다.

되돌아보면 이 회장이 기업가로 활동하던 시절엔 그래도 정치에 등급을 매기는 게 가능했다. 나락 끝까지 떨어진 줄 알았던 당시의 정치가 오늘날보다는 나았었다는 의미다. 시중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도 수리비에 대한 견적은 나올 정도였다. 이는 품위나 품격 면에서 당시 정치가 지금보다 조금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정치의 품격이나 품위를 가르는 기준은 도덕성이다. 삼가고 또 삼가며 언행을 바르게 하면서 자신을 끝없이 성찰하는 게 도덕성을 지닌 이의 기본자세다.

도덕성은 정치를 평가하는 핵심 요소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를 대체할 요소는 없었다. 학문을 닦아 군자가 되고 덕을 쌓아 성인이 되고자 했던 것도 모두 도덕정치를 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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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과 기능성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때때로 좋은 정치의 필요조건조차 되지 못하는 요소들이다. 뭉뚱그려 실력이라 할 그것들을 최우선으로 삼자면 어느 사회에서나 정치는 보수진영의 전유물이 되어야 마땅하다. 실력 면에서 따지자면 출발점이나 과정에서 한결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보수집단이 전반적으로 우월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킬 것 많은 보수진영에 늘 부패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는 점이었다. 보수의 그런 흠결을 보완해주거나 대안으로 기능하는 것이 진보정치였다. 구습 타파나 구악 척결 등을 통해 역사 발전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도 진보의 몫이었다. 진보의 그 같은 기능과 역할을 뒷받침하는 것이 다름 아닌 도덕성이었다. 그런 까닭에 역사 속에서 보수는 유능하되 부패했다는 평을, 진보는 실력에서 뒤지지만 도덕성에서 우월하다는 평을 들어왔다.

하지만 이런 통념은 요즘 대한민국 정치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부패 정도로 치면 오히려 진보 쪽이 더하다는 평을 듣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엔 진보의 중심인 더불어민주당이 도덕성 면에서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에 뒤진다는 내용의 여론조사도 보도됐다. 그것도 민주당이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결과였다.

이런 현상은 권력과 돈의 맛을 본 진보진영에서 보수 뺨치게 견고한 수구화가 진행된 탓에 빚어졌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 많아진 것이 근본 원인이다. 진보세력의 타락 사례는 최근 것만 해도 수없이 많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사회운동가 행세를 하며 잇속을 챙기고,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를 주고받고, 국회의원 신분을 지닌 채 안 보이는 곳에서 코인놀이를 하며 2030의 피땀 어린 돈을 긁어모으고, 일제 징용 노동자들의 체계적 투쟁을 돕는다는 구실로 돈을 요구하고, 진보진영의 행동대 역할을 해온 대기업 노조가 하청기업 여성 근로자들을 술자리에 불러들여 갑질을 한 일 등등이 그에 해당한다.

특히 가증스러운 점은 그 같은 일탈이 착한 체, 가난한 체, 약자인 체 하는 가운데 위선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나쁜 짓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조차 못 느낀다는 점 또한 할 말을 잃게 하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이가 자녀의 부정입학을 시도하기 위해 서류를 조작하고도 뻣뻣이 고개 들고 주유하듯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언(巧言)을 늘어놓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다른 부정 행위자들도 마찬가지다. 진영 내부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그 냄새를 유발한 사람 누구도 반성하거나 진솔한 사과를 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일탈 행위 당사자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요란한 실정이다. 그러더니 이젠 진보가 도덕적이어야 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반문까지 그들 진영에서 나왔다. 하다하다 ‘보수가 진보를 도덕성의 굴레에 가뒀다’는 궤변이 제기되기도 했다. 도덕성이란 브랜드가 거추장스러우니 떼어내 버린 뒤 본격적으로 일탈을 행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릴 만한 주장이었다. 과거 보수 진영 인사들이 부정한 짓을 하다 들키면 무안해하는 표정이라도 짓던 것을 생각하면 달라도 너무 다른 낯선 모습들이다.

더불어민주당 중심의 진보진영에서 벌어지는 이런 행태들은 민주당이 과연 진보정당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사실 지금의 민주당이 진보세력에 해당하는지를 두고는 심심찮게 이견이 제기되곤 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진작부터 민주당을 칭할 때 진보 대신 좌파란 표현을 쓴 것도 그런 이견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정치이념 상 좌파일 뿐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바탕에 깔려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민주당이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도 의문을 품고 있다. 김어준씨처럼 진보 이념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선동가가 진영을 이끄는 것부터가 의문을 자극했다. 보다 결정적 계기는 민주당 정권이 북한의 인권유린에 침묵하는 것을 넘어 탈북민을 강제 북송함으로써 인권유린을 자행한 일이었다.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에 대응하는 태도 또한 인권 존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유와 경쟁이 보수의 핵심가치이듯 인권은 평등과 함께 진보의 핵심가치로 여겨진다.

말이 좋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지 민주당 정권은 친북 좌파적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펼쳤다. 중국을 대하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툭하면 우리를 향해 내정 간섭 수준의 행동을 일삼은 중국에 대해 ‘큰 산’ 운운하며 우러러보는 양태까지 드러낸 쪽이 민주당 정권이었다. 미국이라면 까닭 없이 이빨을 드러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민주당 정권이 중국·북한을 상대로 발휘했던 인내심의 10분의 1만 야당에 베풀었어도 우리 사회가 두 쪽으로 갈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2018년 민주당이 개헌안을 발표할 당시 헌법 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삭제한 일이었다. 곧바로 발표를 철회하긴 했지만 당시의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아 넘기기 힘들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과민 탓인지 모르겠지만, 필자에겐 ‘자유’ 삭제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 정신을 수용하자는 것으로 이해됐었다.

인권과 평등 외에 환경, 소수자에 대한 관심, 성인지 감수성 등을 따져보더라도 민주당이 과연 진보 정당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청년 정치인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지만 원로 뺨칠 만큼 노회한 청년들이 주류로 활약해온 곳이 민주당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부도덕한 행동과 거짓말, 막말을 밥 먹듯 하며 진영의 전사를 자처했다. 정의와 공정을 외치며 당내에서 메기효과를 일으켜야 할 그들이건만 눈길을 주는 곳은 오로지 권력의 중심이다.

부패한 보수에 더 부패한 진보가 가세하면서 우리 정치판은 수리비 견적이 안 나올 만큼 망가져버렸다. 이건희 전 회장이 아직 생존해 지금의 정치판을 다시 평가한다면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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