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손에 잡는 책이 명심보감이나 채근담, 탈무드 등이다. 명심보감이니 채근담이니 했지만 사실은 모두 역서(譯書)들이다. 오래 소장해온 이 책들은 곳곳에 메모가 곁들여져 있어서 내겐 제법 귀한 물건들이다.

동서의 명저들인 이 작품들엔 묘한 끌림이 있다. 그래서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이 책들을 눈으로 훑듯 읽어내리곤 한다. 심란함을 달래주거나 공감할 수 있는 문구 또는 이야기를 찾아보기 위함이다.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명심보감 천명편(天命篇)의 ‘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 逆天者亡)’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살아오면서 늘 기억하려 한 경구는 채근담 속의 ‘문장(文章)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기이함(奇)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알맞음(恰)이 있을 뿐이다’라는 표현이다. 기발한 표현보다는 알맞은 표현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위의 세 작품들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일상사와 연관된 각각의 주제들을 간단히 정리해 나열해놓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 덕분에 책갈피를 끼워가며 맥락을 놓치지 않고 읽어나가야 하는 여느 책들과 달리 부분부분 읽을 수 있어서 불쑥 집어들기 좋다.

그런 식으로 얼마 전 일별한 것이 ‘신역(新譯) 명심보감’이었다. 특히 시선을 둔 곳은 ‘언어편’에 나오는 ‘사람의 말은 하기에 따라 따뜻한 솜처럼(如綿絮) 되기도, 날카로운 가시처럼(如荊棘) 되기도 한다’고 적힌 부분이었다. ‘입과 혀는 재앙과 근심의 문(禍患之門)’이란 군평(君平)의 경구도 새삼 눈길을 끌었다.

이 부분들을 일부러 찾아 읽은 것은 최근 뉴스를 보다 얻은 불유쾌한 감정의 앙금 때문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최강욱 의원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질의하면서 ‘깐죽거린다’는 발언을 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최 의원의 막말·반말 사용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런 말은 아무리 자주 들어도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들을 때마다 불편하고 불유쾌한 감정이 스며온다. 더구나 예의 ‘짤짤이(혹은 ○○이)’ 못지않은, 그 정도의 저급한 발언이 국회 질의 과정에서 튀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었다. 관전자 입장에서도 변칙적인 기습 공격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최 의원의 발언은 국민의 대표가 국무위원을 상대로 한 질의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국민을 대표해 한 발언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국민들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국민들의 수준이 그 정도에 불과하다고 멋대로 단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최 의원은 ‘깐죽거리다’가 국어사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국어사전에 기록돼 있으니 함부로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형수 욕설’에 동원된 ‘현란한’ 단어들도 예외 없이 국어사전에 올라가 있다. 이는 우리의 국어사전이 백과사전에 가깝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수록어 늘리기에 치중해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현실이 그렇다. 요는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단어라 해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우리의 정치 언어가 언제부터 이리도 저급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숨소리마저 공적 메시지일 수밖에 없는 대통령이 혼잣말이라곤 하지만 ‘쪽팔려서∼’라는 비속어를 쓰고, 국회에서는 의원들 간에 반말과 고성이 예사로 오가고, 국무위원을 상대로 한 의원 질의에서는 듣기 불편한 비아냥이 난무하는 게 일상화되어버렸다. 최근엔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이 여성가족부 대변인을 의사당 내 화장실까지 쫓아가 맨 이름을 직함도 없이 함부로 부르는 볼썽사나운 일도 벌어졌다.

정치인들이 공인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기는커녕 국민들의 정서를 해치는 상황이 일쑤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건 외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오르는 표현들까지 포함하면 정치인들의 저급한 막말은 가히 홍수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동훈 장관 등 어느 일방을 역성들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권자이자 정치 소비자 입장에 있는 내가 불편해서 하는 말이다.

정치인들의 막말은 정적과의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키는 것을 넘어 국민정서를 거칠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거칠고 부정적 의미를 지닌 일상어나 유행어가 국민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일반화된 상식이다. 심지어 경음(쌍자음 발음)이 많이 들어간 언어를 쓰는 곳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정이 자연스레 거칠어진다는 분석도 제시돼 있다. 개인적으론 그런 언어권의 사회 구성원들이 대개 다혈질적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

정통 언론들은 상스러운 표현이 아니더라도 부정적 의미를 지닌 단어라면 최대한 사용을 자제한다. 언어가 국민 정서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다는 통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 위원회의 권유로 사용이 자제되는 ‘극단적 선택’이란 말 등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이 표현은 한동안 ‘자살’의 대체어로 쓰여왔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가 이 대체어에는 불행한 선택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는 개개인의 불행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보다 강조되는 요즘의 시대흐름도 함께 고려한 것이었다.

‘묻지마 범죄’란 말도 사용 자제 대상이 됐다. 되레 범죄를 유발하는 부정적 측면이 있고 범죄의 원인을 묵살하는 듯한 표현이라는 점이 그 이유다. 정부·여당에 의해 권고되는 대체 표현은 ‘이상 동기 범죄’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내 윗세대 어른들은 친구들끼리 아호를 부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나이 들어서도 서로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 보면 상대를 마구 대하기 십상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들 세대가 주류이던 시절엔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문화가 형성돼 있었다. 3김(金)의 경우 중국의 위·오·촉을 연상시킬 만큼 치열하게 정쟁하면서도 제각각 최소한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DJ니 YS니 JP니 하는 호칭들도 그런 정치문화의 산물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런 정치문화를 요즘 정치인들도 한 번 쯤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밝은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지는 못할망정 국민정서를 병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막말은 정치인 스스로 화를 부르는 일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입과 혀는 재앙과 근심의 문’이란 명심보감의 경구는 지금도 유효하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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