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재정위기에 몰린 한국전력의 ‘낙하산’ 사장 영입을 지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치인 출신 김동철 사장 선임을 위해 지난 18일 열린 한전 임시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해당 안건에 대해 찬성을 표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22일 연합뉴스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혜영 의원(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전해 받은 국민연금공단 쪽 자료 ‘한국전력공사 사장 임명 관련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결과’를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번에 밝혀진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국민연금이 한전 주총 의결권 행사 과정에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패싱한 채 기금운용본부 자체 판단만으로 찬성을 결정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기금운용본부가 외부 자문기관의 반대 권고를 묵살한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결국 지난 한전 임시주총에서는 김동철 사장 선임 안건이 가결됐고, 한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인 출신이 사장직을 수행하게 됐다. 소위 ‘낙하산’ 사장이 적지 않은 한전 지분을 지닌 국민연금의 지지를 업고 무난히 한전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사진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한전은 정부 입김에 휘둘리기 쉬운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공익사업을 하는 기업이면서 증시에 상장된 주식회사로서 주주의 이익에도 봉사해야 하지만 지배구조 상으론 정부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어 있다.

한전 지분 비율은 산업은행 32.9%, 정부 18.2%, 국민연금 6.55% 등으로 짜여져 있다. 산은과 국민연금이 친정부 기관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부가 압도적 과반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전 이사회와 주총을 거친다고는 하지만 한전 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여서 사실상 정부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한전이 정부의 정책논리 또는 정파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개연성을 암시해준다. 이번 김동철 사장 취임은 그 개연성이 현실화된 사례의 하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지금의 한전 지배구조로 보면, 정부는 국민연금의 의사와 무관하게 마음먹은 대로 특정 인물을 한전 사장에 앉힐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전 사장 선임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과연 본래의 기금운용 취지에 걸맞게 행동했느냐 하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한전은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해 있다. 누적 부채가 200조원을 넘어섰고, 그 결과 채무 이자로만 하루 70억원가량을 지출하고 있다. 재정난을 채권 발행으로 해결해왔으나 그마저 발행한도에 걸리자 지난해 말엔 국회 도움으로 한국전력공사법(한전법)을 개정해 겨우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재정난은 해소되지 않았고, 늘어난 채권 발행 한도마저 거의 채우는 최악의 상황에 다가가고 있다.

전·현 정부의 탈원전 및 전기요금 인상 억제가 재정위기를 심화시킨 측면이 있지만, 한전의 방만한 운영 또한 재정상황을 악화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모든 원인들이 결합해 만들어낸 결과가 오늘날 한전이 안고 있는 만신창이 재정상황이다.

한전의 재정위기를 부른 원인들을 되돌아볼 때 지금 한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전력사업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지닌 유능한 리더십이다. 이는 특별히 설명을 가할 필요도 없는 상식에 속한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정부의 입맛만을 의식해 한전 낙하산 사장 임명에 동조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이처럼 중요한 안건을 다루면서 국민들이 납부한 보험료를 관리·운용하는 수탁자로서 책임을 다하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수택자책임전문위까지 패싱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내 투자위원회의 자체 판단에 의해 이뤄진 이번 행위에 절차적 문제가 있는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런 행위가 국민들의 피 같은 보험료를 맡아 관리하는 국민연금의 본래 임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연금 기금은 국민연금법(제 102조)에 명시돼 있듯이 ‘재정의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 수익을 최대로 증대시킬 수 있도록’ 운용돼야 할 대상이다.

안 그래도 국민연금은 기금의 지속성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는 가운데 청년층 등으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바탕엔 국민연금 운용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국민연금이 스스로 독립성을 훼손해가며 수탁자로서의 기본의무마저 소홀히 하는 모습을 드러낸다면 현 정부의 연금개혁 목소리도 결국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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