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새해에 품은 소망들 중엔 예년과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일차적 소망이야 으레 그렇듯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지만, 이번엔 그 못지않게 절실한 게 하나 더 생겨났다. 정치인들로부터 막말과 거짓말 좀 안 듣고 사는 게 그것이다.

최근 수년간 정치인들, 특히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이 뿜어낸 언어공해로 인해 느낀 불쾌감을 생각하면 늘 분노가 치민다. 대표적인 예가 ‘짤짤이(사실은 XX이)’나 ‘암컷’, ‘금수’, ‘발목때기를 분질러놔야’,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인 줄 알더라’ 등등이다. 대법원 확정 판결로 추잡한 범죄 혐의가 공인된 뒤에 당사자들 입에서 표정 변화도 없이 나온 ‘양심’이니 ‘진실’이니 하는 거짓 언어들도 그에 못지않은 언어공해 사례들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선거권을 행사하는 건 최악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누군 차선을 선택하기 위해 투표를 한다지만 내 경우엔 누군가를 떨어뜨리기 위해 투표소에 갔다. 차악을 선택하는 게 목표였다. 이른바 제한적 합리성 원칙에 의하면 우리 일상에서는 어차피 100% 합리적 선택이 이뤄지기 어렵다. 합리적 선택을 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그래서 ‘가장 나쁜 사람’이 누구인지를 대략 가늠해본 뒤 그를 꺾을 확률이 높아 보이는 이에게 한 표를 던져왔다. ‘가장 나쁜 사람’을 고르는 일차 기준은 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하는 후보 각자의 범죄 이력이다. 언론을 통해 막말·거짓말 이력이 드러나면 그 후보 역시 머릿속의 ‘나쁜 사람’ 리스트에 올려놓는다.

프로필 자료를 대략 훑다 보면 학력 세탁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 흔적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해당 후보를 배제 리스트에 올리는 요인 중 하나다. 무학력이면 스토리에 감명받을 여지라도 있지만 학력 세탁은 그냥 정직하지 못한 후보임을 자백하는 자료일 뿐이다. 김건희 여사의 학력 세탁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다수로부터 미움을 샀던 것을 기억해보면 사람 고르는 내 취향이 유별난 건 아닌 듯싶다.

사실 요즘 정치인들에게서 민생고 해결 의지나 능력을 바라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려는 것(연목구어)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다. 사회 각 분야가 나날이 전문화되고 발전되는 가운데서도 정치권만은 퇴행하는 흐름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정치인들의 지적 수준도 이전보다 많이 낮아져 있다. 지사형 정치인이 국민을 계도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다. 정치인 모두 고학력이나 화려한 이력을 지닐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학력이 낮더라도 특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면 국회에 진출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철저히 구축하는 국내 정치현실을 놓고 보자면 국회 안에서 전문가가 설 땅은 이미 없어진 듯 보인다. 얼마 전 경제전문가 의원이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한 번일망정 수천명을 상대로 경제강의를 하는 게 더 낫겠다’라는 취지를 밝힌 것이 그런 현실을 웅변해주었다. 그가 밝힌 불출마의 주요 이유는 후진적 정치구조였다.

두부 모 잘린듯 두 진영으로 갈린 현재의 정치판에서 각 진영의 리더가 요구하는 것은 오직 전투력이다. 전투력을 키우는 효과적인 방법은 공격의 날을 벼리는 것이고, 그 대표적 수단이 막말과 욕설이다. 필요하다면 선전·선동을 위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그런 환경 탓에 민주당에서는 희대의 막말꾼이나 역대급 가짜뉴스 제조자 등이 팬덤을 기반으로 소속 진영으로부터 칙사 대접을 받고 있다.

이제 민주당 정치인들이 출세하는 방법은 간단해졌다. 자기 진영 리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상대 진영에 대한 최전방 공격수를 자처하면 그만이다. 이때 가장 손쉬우면서도 즐겨 쓰는 도구가 막말이다. 그저 독성만 키워 내뱉으면 계좌로 정치자금이 들어오고 당내 지지기반이 다져져 공천까지 용이해진다. 일거양득에 일거삼득이다.

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눈 딱 감고 내지르면 그만인 게 막말이다. 아주 쉽다. 대통령을 입에 올릴 때 호칭 없이 이름 석 자만 말하면 되고, 대통령 부인을 ‘암컷’ 등으로 칭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야비한 방법이지만 ‘깐족거린다’와 같은 자극적 언사를 양념처럼 버무리면 공격 효과는 한 번 더 높아진다. 머리 데워가며 현안에 대해 공부하고 논리를 개발해 정치적 논쟁을 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도 실속 있는 방법이다.

더욱 가증스럽고 절망스러운 점은 막말·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 대다수가 청년이거나 초선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청년 혹은 초선다운 도전정신과 패기를 드러내는 대신 팬덤에만 정신 파는 행태를 보여주며 한국 정치를 오염시키고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강경파 청년 정치인들이나 정치 신인들이 여·야 대립구도를 불가역적 상태로 만드는데 앞장서왔다.

행동 양상은 다르지만 여당의 청년 및 초선들도 나을 게 없다. 지난해 초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윤심(尹心)에 부응하려는 듯한 ‘연판장 사건’을 일으킨 초선들을 보면 그들에게 일말의 정치적 패기나 정의 구현 의지가 있는지 의문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 의원들이 주로 구설에 오르는 것은 민주당 소속 청년이나 초선 그룹의 막말·거짓말 ‘활약’이 워낙 화려해서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민주당 내 비명계 핵심 그룹 이름이 ‘원칙과 상식’이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 이름은 윤석열 정부의 대표 구호인 ‘공정과 상식’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이 채택된 것을 보면 야당 내부에서도 막장 대결에 대한 피로감이 얼마나 심하게 누적돼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해서 말인데, 새해 총선에선 더도 덜도 말고 욕설·막말 이력이 있는 정치인들만이라도 우선 걸러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 정치인은 어차피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앞길에 훼방만 안 놓아 주어도 고마운 존재들이니 그 이상은 바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 저질들을 들어내야만 청년층 중에서도 제대로 된 이들이 정계에 진입할 여지가 생겨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막말 정치가 서서히 종언을 고하려 한다는 점이다. 아직 미약하지만 그런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내 ‘원칙과 상식’ 그룹의 탄생은 그 상징적 단면이다.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여당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게 된 점도 그런 기류의 한 줄기로 읽힌다.

이 같은 현상들은 백해무익한 좌·우파 간 이념 대결이 끝나고 상식 대 비상식, 원칙 대 무원칙의 대결 구도가 정치권에 새로이 조성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반가운 일이다. 누가 더 상식적인지 누가 더 원칙에 충실한지를 다투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들에게 큰 기대를 걸겠다는 건 여전히 아니다. 내가 세금 내서 먹여 살리는 그들로부터 막말·욕설만 안 듣고 살아도 정신건강이 좋아질 듯하니 정치가 제발 그 정도 수준만 갖춰주면 좋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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