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최진우 기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또 동결했다. 금리 인하에 대한 시장의 요구에 부응할 여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시장이 진작부터 예상했던 대로다. 연속 동결 횟수로만 이번이 아홉 번째다. 한은은 작년 1월 기준금리를 3.25%에서 3.50%로 올린 이후 지금까지 같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이번 결정으로 한국과 미국(5.25~5.50%)의 정책금리 격차는 상단 기준으로 2.00%포인트를 유지하게 됐다. 이 같은 격차는 최소한 올해 상반기까지는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시장은 22일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한국은행이 이번에도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아왔다. 국내 물가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가계부채 증가세도 좀체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점이 그런 전망의 배경이었다. 국내 가계대출의 주류인 주택담보대출(전세자금 대출 포함)만 해도 지난 1월 중 4조9000억원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주담대 총잔액은 855조3000억원에 달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한은이 금리 인하에 나서지 못 하는 이유 중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강화된 긴축 기조도 포함돼 있다. 월가의 시장 전문가들은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 시점이 빨라야 올해 6월일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예의 5월 인하론은 이미 소멸되다시피 했다.

연내 예상되는 연준의 금리 인하 횟수도 기존의 6회에서 3회로 줄더니 요즘 들어서는 그마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젠 0회 인하를 점치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유는 끈질지게 이어지는 미국의 고물가다. 특히 지난주 미국 노동통계국이 1월 소비자물가 동향을 발표한 이후 기준금리 조기 인하에 대한 기대는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노동부가 밝힌 미국의 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월 대비 0.3%, 전년 동기 대비로는 3.1%였다. 시장 전망치를 크게 뛰어넘는 수치들이다. 언론에서는 이 같은 결과를 ‘쇼크’라 표현했다. 시장이 예상한 1월 CPI 상승률 전망치는 전월비 0.1% 수준이었다.

1월의 근원CPI도 비관적인 수준을 나타냈다. 노동부가 밝힌 상승률은 전월 대비 0.4%, 전년 동기 대비 3.9%였다. 작년 12월에 기록된 각각의 수치(0.3%, 3.9%)보다 높거나 비슷한 수준에 해당하는 결과였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장기화되는 가운데 거시경제 지표들마저 양호한 흐름을 보이자 연준 내 분위기는 오히려 강경해지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장 일각에서는 연준이 금리 동결을 이어가면서 양적긴축을 이어갈 것이란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양적긴축이란 양적완화의 상대적 개념으로 중앙은행이 국채 등 자산을 내다 팔아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는 것을 지칭한다.

기준금리 조기 인하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는 미 국채금리 추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금리의 바로미터인 10년물 미 국채금리는 이달 들어서만 0.4%포인트 이상 올라 4%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책금리가 한동안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이란 시장의 판단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난센스다. 당장 양국 간 기준금리 차이가 더 벌어지는 것부터가 한은으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국내 경제상황도 기준금리 인하를 어렵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요인은 꺾이지 않는 고물가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한은의 목표치(2%)를 크게 웃도는 상황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점이 기준금리 인하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1월 들어 반년 만에 2%대(2.8%)로 내려갔지만 하락세가 지속될 것이라는데 대한 시장의 믿음은 거의 없는 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물가상승률이 조만간 다시 3%대로 올라갈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식료품 등을 포함하는 근원물가와 생활물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특히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 등은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 탓에 물가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상의 상황들을 종합할 때 한은이 기준금리 인하에 나설 시점은 오는 7월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미 연준이 6월 11~12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피벗(통화정책 방향 전환)을 단행하면 그 다음달(11일)로 예정돼 있는 금통위 회의에서 한은도 비로소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릴 것이라는 의미다.

금통위는 이날 정례회의 직후 발표한 의결문을 통해 “물가 상승률의 둔화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물가가 목표 수준으로 안정될 것으로 확신하기는 아직 이르고 대내외 불확실성도 크다”고 전제한 뒤 “주요국 통화정책과 환율 변동성, 지정학적 리스크 등 대내외 정책 여건의 변화도 점검할 필요가 있는 만큼 현재의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금통위 회의를 마친 뒤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상반기 안에 금리를 인하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의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3개월 금리 전망에 대해 이 총재는 “저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5명은 3개월 뒤에도 (현행대로) 3.5%를 유지하는 게 적절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나머지 1명은 지금보다 낮은 수준으로 금리를 조정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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