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민 의대생 2000명 증원 카드로 의료계가 벌집 쑤셔놓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전공의들이 줄줄이 의료 현장을 이탈했고, 뒤이어 대학병원 내 전문의 집단인 전임의들마저 가운을 벗어던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의대생 증원 문제로 촉발된 정부와 의료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사태는 역대급 의료 대란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그 와중에 애먼 피해를 입는 쪽은 환자들과 환자 가족들뿐이다.

빅5 병원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 이후 열흘이 지났지만 양측 모두는 한 발짝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의료계는 ‘원점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고, 정부는 본때를 보이겠다는 듯 결기를 드러내며 ‘굴할 수 없다’는 입장만 반복한다.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전과 달라진 정부의 강경 입장이다. 그 배후엔 윤석열 대통령 특유의 완강한 호승심이 자리하고 있다.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쳐진다.

사실 정부의 입장은 우려스러울 만큼 강경 일변도다. 의대 교수들의 개입으로 양측 간 대화가 이뤄질 기미가 나타나던 무렵인 지난 27일 윤 대통령이 의료 개혁 문제를 두고 “협상이나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한 것이 분위기를 더욱 냉각시켰다. 윤 대통령은 의사집단의 기세를 눌러 완승함으로써 대중적 치적 하나를 뚜렷이 남기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30년 가까이 어느 위정자도 하지 못한 일을 성사시켰다는 평을 듣고 싶어 조바심을 내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총선용 운운은 오히려 곁다리 논제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기세등등한 정부 내 분위기는 주무부처 관계자의 정제되지 않은 반응을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보건복지부 박민수 차관은 의사들을 향해 “법률 공부에 열 올리지 말고 사람 살리는 일을 하라”, “정부 정책을 의사들 허락받고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등등의 비아냥 섞인 발언을 쏟아냈다.

근무 이탈 전공의들을 향한 박 차관의 언사는 정교하지 못한 정책논리 못잖게 거칠었다. 남성 수련의들의 아킬레스건인 군 입대를 거론하는 것도 모자라 “해외 취업 불이익”을 입에 올렸고 “3월부터는 수사와 기소 등 사법적 처리가 이뤄질 것”이라는 압박도 서슴지 않았다.

행정부 내에서 의료계 사정을 가장 잘 알 법한 복지부가 말리는 시누이 시늉조차 하려 하지 않으니 사태는 험악한 국면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다. 행정안전부 장관 정도가 하면 어울릴 것 같은 사법 처리 관련 언사들을 보건 당국자가 앞장서서 뿜어내고 있으니 사태가 더 꼬여가는 건 정한 이치다.

정부의 강경한 태도 저변에는 ‘여론은 우리 편’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합리성을 논하기 이전에 강하게 밀어붙이면 소수 의사집단이 결국 절대다수의 여론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자신감이 정부 내에 팽배해져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그럴수록 의사집단의 분노 게이지도 임계점에 다가선다는 점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히포크라테스 선서’ 운운하며 국민들의 감성을 자극해 소구 효과를 얻으려 하는 점도 권리의식이 강한 2030 전공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소수 엘리트 집단이란 이유로 자발적 이행 덕목이어야 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요하는 정부의 태도가 그들의 반발심만 키우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왜 이렇게 됐을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우리는 오히려 시각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건대,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예상을 뛰어넘은 -사실 복지부 실무 담당자들조차 내심 놀랐을 만한- 의대생 증원 규모였다. 논거를 따지기 이전에 대통령이 고집하는 증원 2000명, 증가율 65%가 터무니없는 수치들이라는 얘기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입학생 증감을 논하는 문제라 할지라도 이런 식의 결정을 내리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 만약 어느 당국자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사방에서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유치원 등의 연간 입학생 수를 65%나 늘릴 필요성이 입증됐다 할지라도 부족분을 단칼에 보강하려 들면 감당 못할 부작용들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언이폐지하여 의대생 2000명, 65% 단칼 증원은 그 자체로 반문화적이고 반지성적이다. 여론을 이유로 들곤 하지만 다수 여론이 늘 옳은 것만도 아니다. 정부 정책을 모두 여론대로만 한다면 그런 정부나 국가는 가까운 미래에 패망하고 말 것이다. 절제되지 않은 여론 정치는 포퓰리즘 정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특히 소수 엘리트 집단을 상대로 정책을 펼 때엔 여론을 함부로 들이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직전 정부가 9대 1 혹은 8대 2로 국민들을 편가르기한 뒤 소수 엘리트 집단을 악마화하는 방식으로 지지기반을 다져온 사례를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난에서 의대생 증원의 적정선에 대해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자신이 적정 규모가 이 정도입네 하고 주장할 만큼 의료 분야에 대해 조예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의료 서비스 수요자의 한 사람으로서 의료계를 들쑤셔놓을 게 뻔함에도 불구하고 왜 2000명 카드를 불쑥 내밀었는지 정부에 묻고 싶을 따름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의료계조차 아직 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그저 의대 각각이 희망하는 증가 규모를 합산한 수치가 최소 2000명 정도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숫자를 제시한 당사자들조차 질세라 많이 써냈을 뿐 적정 규모가 아니었다고 뒤늦게 실토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미 끝난 결정이라는 투다.

오히려 교육부는 이달 4일을 회신 시한으로 못박아 각 대학에 의대 증원 ‘희망’ 규모를 묻는 공문을 보낸 뒤 이전 조사 때와 동일한 수치를 써내라 압박하고 있다. 명색은 의대 증원 신청이지만 공문에 적힌 핵심 워딩은 ‘희망’이었다. 교육부의 이번 공문 발송 목적은 ‘정해진 2000명’을 대학별로 어떻게 배분할지를 정하는데 있을 뿐이다.

의사단체와 정부 주장에 따르면 양측은 23차례에 걸쳐 의대 정원 문제를 논의했지만 그 이후의 28차 회동 때까지도 2000명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의사집단의 반박에 정부가 내놓은 답이 앞서 말한 “정부 정책을 의사들 허락받고 해야 하나”였다. 2000명 카드가 이해 당사자들과의 진지한 협의와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면 이런 식의 대응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정된 사회의 최대 자산은 사람들의 행동과 제도 운영의 예측 가능성에 대한 신뢰다. 이를 우리는 사회적 자본이라 부른다. 사회적 자본이 풍부하다는 것은 불확실성이 최대한 제거돼 있음을 의미한다.

자고 나면 천지가 개벽하듯 일상이 격변하는 사회는 선진사회라 할 수 없다. 그런 현상은 사회운영 시스템보다 인치(人治)가 우선시되거나, 문명화가 덜 된 원시 부족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현재 3058명인 의대 정원에 일거에 2000명을 보태는 일이야말로 천지개벽 수준의 반문화적 사건이다. 명색 선진국 정부가 대명천지에 천지개벽할 계획을 국민 앞에 제시하면서 의사 결정 과정과 근거를 소상히 밝히지도 않은 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 또한 엽기적이고 반문화적이다.

정황상 의대 정원 증대는 당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무모하고도 투박한 정책 논리에서 촉발된 의료 대란을 최대한 빨리 해소하기 위해 맨 먼저 이뤄져야 할 일은 정부의 상식 회복이 아닌가 여겨진다. 열 받는다고 환자 곁을 떠난 의사들도 나쁘지만 떠날 테면 떠나보라는 듯 제멋대로 행동한 정부는 그 이상으로 나쁘다고 할 수 있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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