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조근우 기자] “이건희와 그 주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세계를 잘 몰랐다. 이건희는 그게 경영자로서 약점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약점을 굳이 보완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핏줄이 다른 귀족이라고 여기고 있던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삼성그룹 법무팀장으로 근무하고, 퇴사 후 고 이건희 일가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김용철 변호사가 자신의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 쓴 삼성일가 선민의식에 관한 내용이다.

고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일까. 이 부회장의 의지가 적극 개입된 것으로 전해진 인사제도 개편안이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라며 노조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시끌시끌하다. 아울러 노조 탄압 논란까지 불거져 무노조 경영 폐기를 공개 선언한 이재용 부회장의 뉴 삼성에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참고로 ‘오징어 게임’은 456명의 사람이 456억 상금이 걸린 미스터리한 게임에 초대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서바이벌 게임 장르 드라마다. 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게임에 참여하지만 VIP들은 화면이나 벽 너머에서 재미삼아 게임을 지켜본다. 이는 현대사회의 치열함마저도 유희거리로 여길 수 있는 자본계급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함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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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부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인사제도, 현실판 오징어 게임?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 새로운 인사제도를 공개했다. 새 인사제도에는 이재용 부회장의 의지가 적극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제도 개편 안 골자는 이렇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승격이 가능했던 직급별 ‘표준체류기간’을 폐지하고 팀장 평가를 통해 승격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부서장의 직원 평가를 중간 면담에서 수시 피드백으로 바꾸고, 직원들이 서로 업무평가를 하는 동료평가제를 도입하는 것 등도 포함됐다.

하지만 삼성전자 노조는 이미 지난달 23일 ‘삼성전자 직원들은 현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입장을 발표하고, 이번 인사제도 개편에 대해 ‘개악’이라며 반발했다. 그들은 경쟁심화·상호견제 인사평가가 안 그래도 극심한 삼성전자의 노동 강도와 경직된 사내문화를 더욱 키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전자 노조 관계자는 나이스경제와 전화통화에서 “기존 고과제도로 인한 직원들 간의 경쟁과 그로 인한 폐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번 인사제도 개편 계획이 현재 삼성전자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뻔히 예상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노조는 부서장이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부서 직원들의 성과급 인상범위를 변경할 수 있게 할 경우 공정하고 투명한 기준이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승격을 위한 기간 폐지에 대해서는 팀장이 직원의 승격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강화되고, 이로 인한 사내 ‘줄서기 문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부서장의 수시 피드백은 직원들의 관리감독 강화와 상시적인 업무 평가 압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직원들 간의 상호피드백이 함께 도입된다면 부서장을 넘어 직원들끼리 동료를 감시하고 견제하게 만든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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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노조경영 폐기 선언한 이재용 부회장, 가석방 3개월 만에 노조 탄압?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이란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 노사관계 법령을 철저히 지키고 노동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

지난해 5월 이재용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대국민 사과가 나온 배경에는 이재용 부회장의 국정농단 재판과 관련이 있다. 2심 파기환송 재판에서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반성과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라고 말하자 삼성은 지난해 3월 준법감시위원회를 설립한다. 준법감시위원회는 이 부회장에게 사과를 권유했고, 이 부회장은 2달 가까이 지난, 5월에 사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용 부회장은 ‘국정농단 공모’로 수감됐다가 지난 8월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상황과 글로벌 경제 환경을 고려한다는 명목 하에 가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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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부회장이 가석방 된지 3개월 만에 삼성전자에서 노조 탄압논란이 불거졌다.

삼성전자 노조는 사측이 인사제도 개편 안에 반대하는 성명서 게시와 전체 메일 발송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사측이 성명문 게시 20분 안에 따로 연락해 ‘성명문은 허위사실 유포이며 노조가 삭제하지 않으면 회사가 삭제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노조가 사측과 주고받은 메일을 보면, 사측은 노조가 요구한 전체 메일 발송을 거부하며 내용 수정을 요구했다.

삼성전자 노조는 “단체협약 상 노조가 전체 메일을 요구하면 회사는 먼저 발송한 뒤 내용 수정을 할 수 있게 돼 있음에도 사측이 이를 어기고 메일을 사전 검열했다”며 “이번 삼성전자의 노조활동 개입과 방해는 삼성 재벌이 선언한 무노조경영 폐기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고 목청을 돋웠다. 이어 “삼성이 무노조경영의 ‘올드’ 삼성이 아니라 노조활동을 보장하는 ‘뉴 삼성’으로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측과는 인사 개편안과 노조탄압 논란 주장에 대해 공식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번 전화 시도를 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이 가석방되고 불거진 노조 탄압논란, 삼성 무노조 경영에 깊게 물들어 있는 사측의 충심(忠心)인지, 아니면 이재용 부회장의 복심(腹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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