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푸른 눈, 갈색눈 -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수업 이야기’(윌리엄 피터스 지음)는 책 제목처럼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책은 한 미국 교사가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눈동자의 색깔로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인위적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나타난 실제 현상들을 생생히 기술하고 있다. 멀쩡히 잘 어울려 놀던 아이들은 선생님이 눈동자 색깔에 따라 우열을 매기자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우등한 그룹의 아이들이 상대 그룹 아이들을 공연히 적대시하는 것은 물론 해코지하는 일도 벌어졌다. 똘똘하던 아이는 갑자기 바보가 된 듯했고, 어떤 아이는 걸음걸이마저 이상해졌다. 차별의 부작용은 당하는 일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차별을 가하는 쪽의 영혼도 피폐해져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책에서 보듯 차별은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외모의 차이, 언어의 차이, 생각의 차이, 취향의 차이 등등이 모두 차별을 잉태하는 씨앗들이다. 편가르기 요인이 무엇이든 사람은 대개 동질감을 느끼는 그룹에 호의를 베풀고, 그렇지 않은 그룹을 배척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를 입증해준 실험 결과는 무수히 많다. 중요한 점은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있을 수밖에 없는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느냐, 거부하고 배척하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성과 균형감을 좌우한다.     

단일한 문화와 민족혼을 공유하며 살아온 우리에게는 이념의 차이가 늘 골칫거리로 작용해왔다. 지금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지난 수십년 간 우리 사회를 긴장된 분위기로 몰아넣었던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구도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대신 진보 대 보수의 새로운 대결구도가 형성돼 양쪽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같은 상호 차별 행위가 끝없이 누군가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엔 정치권과 언론이 유독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심지어 차별과 갈등을 관리해야 할 위치의 정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상대에 대한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갈등을 부채질하는 예도 나타난다. 특정 이슈만 놓고 보면 정치권도 언론도, 때론 학계조차도 온통 진영논리에 휘말려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주제를 상대로 이념색 없이 사리와 논리만을 들이댔다간 회색분자로 몰리기 일쑤다.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이념 장사꾼들의 준동이다. 이념을 브랜드화해 이권을 추구하는 집단이 여기저기서 날뛰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조그만 계기만 있으면 금세 이념 논쟁이 불붙곤 한다. 그들에게는 모든 사회 이슈를 바라보는 기준이 오로지 이념일 뿐이다.

이념색에 따라 갈라져 있기로 치면 국내 언론들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그러다 보니 행위를 쫓기보다 사람을 쫓아가며 논조가 달라지고, 호오도 뚜렷이 갈린다. 그런 언론들로 인해 합리적 보수와 유연한 진보는 늘 관심권 밖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언론들의 이념화로 인해 빚어진 현상 중 하나가 친노 기자, 친이 기자, 친박 기자 등등의 출현이다. 친노, 친이, 친박이 정치인들만의 브랜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언론계 내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같은 현상은 일부 언론인들의 정계 진출과도 어느 정도 맥이 닿아 있다. 그들 모모한 기자들은 현직에 있는 동안 권언유착의 매개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사족 같지만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일찌감치 언론계를 떠나 이런저런 사회단체에서 활약하다가 보다 효율적으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권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다.

가장 심각하고도 무서운 것은 정치인들의 이념 놀음이다. 이념 놀음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주제 중 하나가 최근 논쟁거리로 부상한 건국일 설정이다.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개인적 의견을 미리 밝혀두자면, 필자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 하루 속히 건국일(또는 건국절)이 명시돼야 하고, 그 선택은 1919년 4월 어느 날(11일이든 13일이든)인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번 논란에 사실상 불을 댕긴 이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다.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제 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말한 것이 단초가 됐다. 문재인은 경축사 발표 이후 이 부분을 문제시하며 “얼빠진 주장”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경축사에 건국일 논란을 야기할 의도가 배어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연설을 끝까지 경청했거나 전문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연설문이 ‘건국 68주년’에 방점을 찍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리라는게 필자의 판단이다. 첫 문장에 한 차례 등장하고 마는 이 표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에 대한 의례적인 표현이었다고 보는게 옳을 듯하다. ‘71주년’이란 말이 세 차례 등장한 것도 연설문의 방점이 ‘광복절 기념’에 찍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덧붙이자면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도 재임중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1948년 정부수립일을 토대로 기산한 건국 ‘○○주년’을 말했었다.

지적하고 싶은 점은 문재인 정도 되는 인물이 그 부분을 부각시켜 문제시할 경우 필히 이념 논쟁이 일어나게 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스스로 이를 예측하지 못했다면 정무 감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고, 알았다면 그 의도가 불순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문재인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를 감안할 경우, 혐의는 후자 쪽으로 치우치기 쉽다는 사실이다. 대붕의 꿈을 키워온 문재인이 김대중 노무현의 과거 경축사도, 박근혜의 이번 경축사도 정독하지 않고, 그처럼 민감한 문제를 함부로 언급하면서 도발적 언어를 구사했다고 믿기엔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서다. 서서히 대선 정국이 조성되고 있는 현재 분위기 또한 그같은 의심을 자극한다.

엄밀히 역사성만을 따져보자면 건국일 논쟁은 정치 이념과 연관될 특별한 이유가 없다. 지난 과정을 돌아보더라도, 1919년 지지론이 진보의 전유물이란 등식은 쉽사리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1948년 지지론이 보수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되어버렸다. 일각의 견해대로 현재의 대립 구도가 뉴라이트의 이승만 국부론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면 대한민국 정치권 전체가 너무 한심스러워진다.
     
국사 교과서에 건국일이 명시돼 있지 않은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역사가 그 정도로 기구하고 유난스러웠기에 나타난 현실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건국일 설정이 반드시 해결돼야 할 과제라는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정치권은 건국일 설정과 관련해 역사를 해석하고 그 결과를 가시화하는 논의에서 빠지는게 옳다고 본다. 이 분야의 비전문가인 정치인들의 참여는 오히려 역사 해석의 순수성과 객관성을 저해할 위험성만 높일 수 있는 탓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국일 설정 과제만큼은 이념 논쟁에서 보다 자유롭고 전문성을 갖춘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편가르기와 차별, 색깔 씌우기가 체질화된 정치인들에게 건국일 설정은 어울리는 주제가 아니다. 학계에 의해 확정된 건국일을 건국절로 삼을지 여부는 그 다음의 일로서 정부 또는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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