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미국에서는 ‘오바마스럽다’(So Obama)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언론을 통해서다. ‘오바마답다’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은 한동안 ‘쿨하다’ 정도의 의미로 통했다.

2009년 7월, 미국 사회는 잠겨 있는 자기집 대문을 강제로 열려던 하버드대 흑인 교수가 신고받고 출동한 백인 경찰에게 체포되는 사건으로 인해 시끄러웠다. 교수를 절도범으로 오인한게 화근이었다. 이 사건은 즉각 인종차별 논란으로 이어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백인 경찰을 향해 “어리석었다.”라고 비난하며 논란에 가세했다. 그러자 백인 경찰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공무집행이었다고 항변했다.

이 일로 인종차별 논란이 증폭되자 오바마는 실수를 인정하고 당사자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화해를 위해 백악관 뜰에서 한여름 저녁 맥주 회동을 가졌다. 백인 경찰의 제의로 이뤄진 맥주 회동 참가자는 오바마와 흑인 교수, 조 바이든 부통령을 포함해 네 사람이었다. 흑인 둘, 백인 둘이었다. 이후 흑백 갈등은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언론은 당시의 맥주 회동을 ‘비어 서밋’이라 불렀다. 맥주 회동이 어느 정상회담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닌 ‘서밋’이었던 셈이다.

‘스럽다’ 또는 ‘답다’라는 말은 그 의미가 간단치 않다. 유교가 가르치는 기본 윤리관도 결국 ‘~다움’의 추구에 다름 아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君君臣臣父父子子)”고 가르쳤다. 유교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워야 한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삼강이 그렇고, 오륜 또한 그렇다. 워낙 윤리만을 강조하다 보니 명칭부터가 ‘유교’에서 ‘유학’으로 세속화됐고, 그마저 고리타분한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유학의 가르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계 윤리의 기본을 이룬다.

그러고 보면 오바마는 유교 윤리를 실천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그게 정치적 제스처였다고 한다면 오바마는 그야말로 유능한 정치인이다.

주한미군 사드 체계의 경북 성주 배치를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논란은 단순한 언쟁을 넘어 사회적 갈등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 일을 보면서 ‘오바마스럽다’라는 묵은 유행어를 연상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우린 오바마를 통해, 폭동으로까지 내달을 위험성이 있는 흑백 갈등도 땅콩 한 접시에 맥주 몇 잔으로 해소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드 체계의 성주 배치 논란은 총리와 국방장관이 현장까지 찾아가 주민들과 대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총리와 장관은 봉변을 당했고, 정부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분노는 오히려 증폭됐다. 사전 통보도 협의도 없이 일부터 저질러 놓고 나중에 찾아와 설득하면 다 되리라는 정부 당국자들의 행태에 없던 분노까지 치솟아 올랐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성주 주민들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반발을 ‘님비’니 ‘지역이기주의의 발로’니 하는 말로 매도하는 것도 잘못된 자세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명쾌하다. 그들은 정부 정책의 희생양이 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받고 있고, 그에 저항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는게 가장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실제로 잘못은 그들 쪽이 아니라 정부에 있다. 사전에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이 첫째 잘못이고, 그들을 논리적으로 미리 설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게 두 번째 잘못이다. 대한민국 어딘가에 반드시 사드가 배치돼야 한다면 그 지역이 어디가 됐든 정부는 그같은 노력을 최종 후보지 발표 이전에 기울였어야 옳았다.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불쑥 장소 발표부터 해놓고 안전에 이상이 없다고 주장하니 그 말에 믿음이 갈 리 없다. 해로운 시설이기 때문에 발표부터 해놓고 밀어붙인다고 여기는게 인지상정이라는 얘기다.

정부의 설명에 믿음이 안가는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국방부를 통해 공개된 미 육군 자료는 사드 레이다 시설 지역의 안전구역을 반경 5.5km 바깥 쪽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3.6km 이내 지역은 관계자만 출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점도 이미 알려진 내용이다. 100m 이내는 완전통제 구역으로 분류됐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국방부는 거두절미하고 100m 바깥 쪽은 모두 안전한 구역이라는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김항곤 성주군수와 주민들은 여전히 5.5km 바깥쪽만이 안전구역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전자파가 해발 400m에 육박하는 고지에서 5도 위쪽으로 발사되는데다 직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뒤늦게 강조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정부가 말바꾸기를 하고 있다고 여길 뿐이다. 정부가 스스로 불신을 자초한 탓에 각종 괴담까지 정부와 주민간 틈을 파고들고 있다. 그 중 다행스러운 점은 김항곤이 무수단 미사일 화형식을 실시하고, 주민들의 항의 시위에 외부 세력이 개입하려는 것을 단호히 막는 등 절제된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정부가 우왕좌왕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효용성 때문이라지만 인구의 절반이 몰려 있고, 대한민국 컨트롤 타워가 있는 수도권을 막판에 사드 방어권에서 제외한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다. ‘수도권 방어 능력도 없는 무기 체계 도입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이 난리를 치러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같은 의문은 사드 체계의 필요성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누구를 위한 사드인가?’라는 새로운 의문을 낳게 하고 있다.

이밖에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직 실전에 사용된 적이 없는 사드가 과연 고고도 미사일을 방어할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사드의 후방 배치 결정으로 불가피해진 수도권 재무장이 결국 예정에 없던 미국산 고가 무기 도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서도 정부는 명쾌한 해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당장은 사드의 안전성 논란을 해결하는게 급선무이니 그 문제로 돌아가기로 하자. 결론을 말하자면 사드 레이다 전파의 안전성 논란은 박근혜가 직접 풀어야 할 과제다. 지금처럼 남의 얘기하듯 사드 문제를 거론하는 자세부터 확 바꾸어야 한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면서 말한 것처럼 “불필요한 논쟁” “우려하는게 이상할 정도로 우려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지역”이라며 뒷전에 서서 훈시나 하려는 자세를 버리지 않는 한 사드 레이다 안전성 논란도 괴담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게 분명하다.

오바마가 비(非)간부 백인 경찰관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맥주잔을 부딪힌 것처럼, 박근혜도 격의 없이 성주 주민들을 청와대로 초대해 대화를 나누며 직접 설득작업을 벌일 필요가 있다. 그 것으로도 모자란다면 사드 체계 배치 후 국방장관과 함께 사드 레이다 100m 바깥 지점까지 직접 가보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사태 해결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게 하는게 ‘안전’을 강조한 자신의 말에 대한 신뢰를 높이면서 대통령다움을 실천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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