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계열사들을 상대로 한 스튜어드십코드의 적용 과정이 순탄치 않게 됐다. 청와대와 정부가 한진칼과 대한항공을 상대로 이 제도를 처음 적용하려 했으나 추진 과정에서 예상 밖의 난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가가 투자 관련 기업의 경영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지침을 의미한다. 국민연금은 정부 방침에 따라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했다.

이를 기반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16일 회의를 열고 스튜어드십코드 실행 방안을 논의했다. 한진 계열 두 개 회사를 상대로 스튜어드십코드를 적용할지 여부와 그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 지가 회의의 주제였다. 기금운용위는 국민연금의 최고의결기관이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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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민연금은 한진칼과 대한항공의 지분을 각각 7.34%, 11.56% 보유하고 있다. 한진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는 한진칼에서는 조양호 회장 일가 등에 이은 3대 주주, 대한항공에선 2대 주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회의에서 기금운용위는 최종 결론을 유보했다. 스튜어드십코드를 적용한다는 대원칙만 확인한 채 전문가회의체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이하 전문위원회)에 판단을 요구하기로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끄는 기금운용위가 바로 결정을 내리는 대신 전문가그룹의 손을 빌려 스튜어드십코드 적용의 당위성을 먼저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계 및 일부 학자들의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은 만큼 전문가회의가 악역을 맡아주길 원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회의의 결론은 정부의 의도와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9명으로 구성된 전문위원회에서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한 스튜어드십코드 적용을 지지한 이는 절반에 못 미쳤다. 대한항공에 대해서는 2명, 한진칼에 대해서는 4명만이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를 위한 주주권 행사에 찬성했다. 특히 대한항공에 대한 경영 참여 안건에는 7명의 위원이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전문가위는 이 같은 결론을 그대로 기금운용위에 보고하기로 했다.

전문가위의 결론은 같은 날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공정경제 추진 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스튜어드십코드의 적극 행사 의지를 강조한 것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앞으로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선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 행사해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기금운용위에 내려진 확고한 지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장 난감해진 곳은 국민연금 기금운용위다. 사실상 복지부의 영향권에 있는 기금운용위로서는 대통령의 발언을 함부로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회의의 결정 내용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려운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운용위가 선택할 카드는 불보듯 뻔히 드러나 있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현행 구도상 운용위가 대통령의 발언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의 이날 발언이 아니더라도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은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다는 점에서 운용위로선 함부로 거부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운용위는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 회의를 열고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한 스튜어드십 코드 적용 여부를 논의한다. 이 자리에서 최종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향후 전개될 여론의 동향이다. 그러나 여론이 복지부나 운용위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지는 않다. 운용위 스스로 절차적 정당성과 민주성 확보를 위해 선택한 전문가 의견 수렴이 반대 여론 형성의 훌륭한 토양이 돼버린 탓이다.

23일 열린 전문가위원회 회의에서 스튜어드십코드 적용에 반대한 위원들은 그 이유로 국민연금 수익성 악화 가능성 등을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가 본래의 연기금 운용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시중의 반대 여론과도 상통한다.

재계와 학계 일각에서는 스튜어드십코드 적용이 연금사회주의를 실현시킬 것이란 우려도 드러내고 있다. 정부가 연금의 운용에 노골적으로 간섭함으로써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더욱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 중엔 스튜어드십코드가 도입되기 이전에도 국민연금이 정부의 지나친 간섭에 휘둘려왔다는 견해를 밝히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스튜어드십코드를 논하기 이전에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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