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최진우 기자] 미국에서 또 디폴트(채무불이행)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미 행정부가 조만간 채무불이행 상태에 접어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등장하면서 정부와 의회 간 책임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의 배경을 이루는 주제는 정부 부채한도 상향조정 문제다. 논란은 미 행정부가 필요한 곳에 재정을 투입하기 위해 차입을 해야 하는데, 그 한도에 걸리게 된데서 촉발됐다.

미국에서 디폴트 논란이 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불거져 나와 미국 조야는 물론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미 행정부는 위기의식을 애써 드러내며 칼자루를 쥔 의회를 압박했다. 반면, 의회는 정부의 속을 태우려는 듯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하며 부채한도 상향 조정을 선선히 해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일쑤였다.

정부와 의회 간 협상은 대개 ‘X-데이’가 임박해서야 타결됐다. ‘X-데이’란 행정부의 재정이 바닥나는 시점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의회는 부채한도 상향조정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곡예를 하듯 막판까지 정부의 속을 태우다가 ‘X-데이’가 목전에 이르렀을 때 부채한도를 올리는데 동의하는 행태를 반복했다.

[사진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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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의회지 실제로 부채한도 상향 조정을 저지하는 세력은 야당이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채한도 관련 논쟁도 야당인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현실을 배경에 깔고 있다. 보수 성향의 공화당은 조 바이든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민주당 정부가 예산을 마구 집행하는 바람에 나랏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 문재인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진보 성향의 미국 민주당 정권은 출범 이래 줄곧 예산 낭비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큰 정부를 지향하며 돈을 많이 쓰기로 치면 미국이나 우리나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공화당은 정부가 먼저 지출을 삭감해야만 부채한도 상향조정에 합의해주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 공화당은 지출 삭감을 요구하는 내용의 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부채한도는 미국 정부의 마구잡이 예산 집행을 견제하기 위해 의회가 설정해둔 총량 제한선이다. 설정된 총부채 한도는 그간 수도 없이 상향조정된 결과 현재 31조3810억 달러(약 4경1479조4058억원) 수준까지 올라가 있다. 미국 행정부가 재정 고갈 위기를 맞았다는 것은 부채 규모가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제로 미국 행정부의 누적 부채 규모는 올해 1월에 법정 부채한도 상한선(31조3810억 달러)에 도달했다. 그 결과 바이든 정부는 특별조치를 동원해 디폴트 사태를 모면해오고 있다. 그런데 특별조치를 통해 동원한 재정도 다음 달 초에 이르면 바닥난다는 게 미 정부의 주장이다.

정부 재정 당국자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이르면 다음 달 초 디폴트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의회가 부채 한도를 상향조정해주거나 최소한 한도 적용을 유예하는 조치를 취해주어야만 국채를 추가 발행해 당장의 위기를 면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 경제계에서도 디폴트 현실화 시나리오를 언급하며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디폴트 현실화가 몰고 올 사태로는 수백만 개의 일자리 감소, 경기 침체 위험 고조 등이 거론된다. 연방정부가 연금 지급은 물론 전기요금 등 공과금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 =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 = AP/연합뉴스]

대외적으로 미국의 국가 신용도가 떨어질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과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시 미 행정부와 의회 간 협상이 막판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국가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됐던 경험이 그 같은 분석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 전망은 디폴트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데 모아져 있다. 아직 그런 전례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옐런 재무 장관도 미국에서 디폴트가 현실화되면 사상 최초의 사례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1789년 연방정부 수립 이후 미국에서 정부발 디폴트가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막판에 이르러서는 결국 의회가 길을 터주는 일이 반복돼왔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1960년 이후 부채한도 상향조정이 이뤄진 것만 78회나 된다.

일각에선 ‘X-데이’가 10월 초가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고 있다. 정부가 엄살을 떠느라 ‘X-데이’가 실제보다 빨리 다가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현실이 어떠하든 미 행정부는 연일 위기를 강조하며 의회를 압박하기 위한 여론몰이에 한창이다. 심지어 바이든 대통령이 이달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에 불참하면서까지 위기 대응 태세를 갖출지 모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백악관의 카린 장-피에르 대변인은 최근 “대통령이 G7 정상회의에 참석한다고 했지만, 디폴트 방지가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말했다. 은연중 G7 불참 가능성을 흘리며 위기감을 고조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발언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9일(이하 현지시간) 의회 지도자들을 만나 타협을 시도했지만 타결에 이르지 못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공화당이 요구하는 예산 지출 삭감 이슈는 부채한도 증액과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해 했다.

공화당 소속인 케빈 매카시 하원 의장은 부채한도를 1년 간 상향조정해주되 연방정부가 예산 삭감에 동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공화당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의료와 교육, 안전, 보훈 등과 관련한 정부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해 중산층의 생활에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란 주장을 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의 늘어난 정부 부채도 전임 공화당 정부 탓이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앞선 트럼프 행정부가 재임 중 부자와 기업들이 내는 세금을 감면해준 것이 연방정부의 재정난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장-피에르 대변인은 10일 대통령과 의회 지도자 간의 전날 만남에 대해 브리핑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디폴트가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라며 “12일 의회 지도자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매일 논의를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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