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한적이나마 주 52시간제를 탄력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반도체 소재 등 일부 품목의 국산화를 위해 연구개발(R&D)에 나서는 기업이 그 대상이다. 이들 기업에 한해 최장 3개월 동안 특별연장근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게 골자다.

정부가 이 조치를 적극 검토하게 된 배경은 지난 달 10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간담회다. 이 자리에서 주 52시간제가 연구개발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기업인의 지적이 나왔던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이 호소는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의 즉각적인 반응으로 이어졌다.

수출 규제 사태가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이 일을 계기로 자승자박 격인 우리 내부의 규제들은 없는지 전반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품 소재와 관련된 연구개발 성과의 부진은 규제에 갇힌 우리 기업의 실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는 기업들이 뭘 좀 해보려고 해도 걸리는 게 많으니 포기하거나, 아예 해외에 공장을 짓고 사업장을 이전해가려는 기류와도 연관돼 있다.

창원 재료연구소. [사진 = 연합뉴스]
창원 재료연구소. [사진 = 연합뉴스]

그런 기류 탓에 요즘 우리 산업계에서는 남 좋은 일만 하는 일이 이전보다 많아졌다. 시장 개척도 하나의 목표라지만 외국에 공장을 지으면 그 과실은 대부분 그 나라가 가져간다. 법인세 수입도, 고용 증대도, 국내총생산(GDP) 증대 효과도 모두 해당 국가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규제는 주요 소재의 국산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 일본의 만행으로 다시 한번 확인됐다. 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우리가 기술적 기반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 규제 탓에 공장 설립에 애로를 겪었음이 한 연구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보고서를 발간한 곳은 ‘반도체 산업구조 선진화연구회’였다. 이 단체가 내놓은 ‘일본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대응방안 검토’라는 보고서는 불화수소 자급 실패의 여러 원인 중 하나로 환경 규제를 지목했다. 규제 개혁이란 측면에서 참고할 가치가 있다.

일본의 대한(對韓) 보복 조치는 규제가 기업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본이 실행하려는 화이트국가 제외 조치를 약술하자면 전략 물자를 한국으로 수출하는 과정에 각종 규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자국의 수출 기업은 물론 물건을 사들이려는 한국 기업에게 지금까지는 생략했던 각종 서류를 제출하도록 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당장 한국 기업은 수입품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안보상 우방이 아닌 나라로 물건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서약서를 매번 일본 통상 당국에 제출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수출 기업도 전과 달리 각종 서류를 새로 작성해 경제산업성에 제출하는 등 피곤한 절차에 시달리게 된다. 지금까지 없었던 수출허가 신청서를 건건이 작성해야 하고, 각종 확인서도 제출해야 한다. 서류를 통해 제품이 상대국에 정확히 도착하는지, 수입처의 제품 사용 목적이 안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지, 수입처가 해당 물품을 제대로 관리하는지 등등을 상술해야 한다. 이 모든 절차를 무리 없이 진행한 뒤 경제산업성의 심사를 무사히 통과해야 비로소 제품을 한국으로 수출할 수 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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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지금까지도 한국으로의 전략 물자 수출을 금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고 있다. 다만 26개 여타 안보 우방국과 함께 한국에 부여했던 규제 해제 혜택을 거둬들일 뿐이라는 게 일본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 규제가 화이트국가 외의 모든 나라들에게 정상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도 일본이 주장하는 내용 중 하나다. 그 주장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일본은 그렇게 우기고 있다.

일본의 야비한 행위엔 분노가 치밀지만 우리 스스로는 와신상담하며 이번 일을 규제의 쓴맛을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 첫걸음이 주 52시간제의 근본적 개선이면 좋을 것 같다. 제한적으로 탄력성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아예 예외 분야를 인정함으로써 해당 기업들로 하여금 상시적으로 이 규제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번에 고용부가 내놓으려는 방안은 현행 근로기준법상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근기법상 특별연장근로를 인가하면 해당 기업은 12시간으로 묶인 주당 연장근로 한도에서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진다. 기업은 이 제도를 활용하려면 신청서를 작성한 뒤 지방고용노동관청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3개월 시한이 지나면 같은 절차를 반복해야 한다. 이 또한 기업에겐 피곤한 규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예 법을 개정해 필요한 기업들에게 상시적으로 규제를 해제해 주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용부의 검토 내용을 보면서 오래 전에 일간지 기자로서 취재차 방문했던 싱가포르의 시스템공학연구소(ISS)가 떠올랐다. 예산의 90% 이상을 국가과학기술청(NSTB)으로부터 지원받아 운영되는 이 연구소는 근무시간에 관한 한 치외법권 지대였다. 1996년 취재 당시에도 싱가포르에서는 이미 8시간 근무제가 엄격히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 연구원들은 몇날 몇달씩 주·야간 연속 근무를 하는가 하면 장기간 연구실을 비우는 일도 종종 있다고 했다. 그들에겐 근무 시간 자체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이 밝힌 이유는 “우린 연구원이다”였다. 며칠씩 비워진 방에 에어컨이 24시간 돌아간다는 점 또한 신기하게 여겨졌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임의로 훌쩍 여행을 가고, 무언가 영감이 떠오르면 집에서 자다가 반바지 차림으로 언제나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연구실로 나가 일에 몰두하는 게 그들의 루틴 아닌 루틴이었다. 연구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소정 근무량이 아니라 연구 성과였다.

그들은 싱가포르 전체를 소위 ‘지능섬((Intelligent Island)’으로 만든 주역들이다. 특유의 물류 자동화를 통해 싱가포르를 물류 강국으로 만든 이들도 그들이다. 취재 방문 직전 해인 1995년 싱가포르가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수출 1200억 달러(미화 기준)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덕분이었다. 우리나라가 수출 1000억 달러를 처음으로 힘겹게 돌파한 때가 1995년임을 생각하면 싱가포르의 경제적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싱가포르가 얼추 서울만한 크기에 우리의 10분의 1 남짓 인구를 가진 나라라는 점을 떠올리면 놀라움을 금하기 어려워진다.

사실 싱가포르는 규제가 유달리 많은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S의 예에서 보듯 필요한 곳에선 규제의 벽을 왕창 허무는 과감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게 지도상으론 말레이반도 끝의 보잘 것 없는 점처럼 보이는 싱가포르가 강소국 소리를 듣는 비결 중 하나다.

규제가 모두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규제도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일단 묶어두고 보자는 식으로 만들어진 규제,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규제 등이다. 잠시만 방심해도 그런 규제는 무한정 늘어난다. 이참에 대청소하듯 그런 내부 규제를 찾아내고 걷어내려는 노력이 펼쳐져야 한다. 이럴 때 기업들이 간절히 원하는 규제들을 취합해 타당성이 인정되면 확 풀어주는 것도 실속 있는 극일(克日)의 한 방법일 수 있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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