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시작한 지 한달여 만에 한 개 품목의 수출을 허가했다. 8일 일본 수출관리 주무 당국인 경제산업성의 세코 히로시게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그 같은 사실을 공개했다. 허가된 품목은 반도체 제조용 감광제인 레지스트였다.

눈길을 끄는 소식은 또 있다. 사흘 전 일본 정부가 중국에 있는 삼성전자 공장으로 가는 에칭가스 수출을 허가했다는 것이다. 해당 수출 건에 대한 신청이 이뤄진 때는 지난 6월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국내에서는 다소 엇갈리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부에선 일본이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렸다고 해석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이 막후에서 압력을 넣은 결과일지 모른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긍정적 해석은 아니지만 언론에서도 기연가미연가하는 논조의 기사들이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혼란스럽기는 정부도 마찬가지인 듯 보인다. 일부 품목이나마 일본의 수출 허가 사실이 발표되자 정부는 이날자로 일본을 화이트국가군에서 제외하려던 계획의 실행을 뒤로 미뤘다. 정부마저도 구체적 액션을 취하려던 계획을 보류할 만큼 일본의 조치는 또 한번 상대의 허를 찌르는 돌발 행동이라 할 만했다.

일본의 이번 조치엔 두 가지 목적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에 대비해 국제 여론전에서 명분을 쌓겠다는 것이다.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순수하게 국제평화를 위한 안보상의 이유로 수출 규제가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한국 경제에 불확실성을 키워 은근하지만 치명적 충격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예측 불허의 상황을 조장함으로써 불확실성을 키워 국내 대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 전반에 손실을 안기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불확실성 증대는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 등에 대한 신뢰 하락으로 이어지기 쉽다. 납기를 맞추지 못하리라는 우려 등으로 수요처가 공급선을 바꾸려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번 조치는 흔히 쓰는 말로 ‘혼네’(本音: 속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 본심)를 감추기 위한 트릭이라 할 수 있다. 혼네를 감춘 일본의 태도는 세코 경제산업성 장관의 발언을 통해 이미 드러났다. 세코 장관은 8일 회견에서 “안보 우려가 없는 안건에 대해 수출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불과 한건의 수출 허가 사실을 공표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세코 장관은 “한국 정부가 금수 조치라는 부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어서”라고 말했다.

[사진 = 연합뉴스]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낙연 총리.
[사진 = 연합뉴스]

아베 정부와 궁합을 맞춰온 극우 보수지 산케이도 이에 화답하며 “이번 수출 허가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금수조치에 해당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요란한 주장들은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가 왜 나왔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상황이 그러하니 정부의 조심스러운 반응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트릭에 현혹되지 않고 좀 더 신중하게 대응하려는 사려 깊은 행동으로 평가할 여지가 더 크다.

하지만 대응 태세의 기본틀을 바꾸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위험하다. 자칫 국민들에게 그릇된 메시지를 전달했다가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을 때 커다란 상실감과 배신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 당국자들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끌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현란한 트릭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도 명분싸움으로 맞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거론되어온 여러 가지 카드의 활용 방안에 대해 적어도 정부·여당의 관계자들은 조화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책임 있는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주제를 두고 다른 목소리가 튀어 나오거나 한 사람의 입에서 오락가락하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 등은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면서 바람직한 집단지성의 형성을 저해할 뿐이다.

내년에 열리는 도쿄올림픽 참가 문제라든가 일본 방문 제한, 지소미아 파기 여부 등이 대표적 주제들이다. 대화를 명분으로 이뤄지는 정치인들의 생색내기용 일본 방문도 자제돼야 한다. 꼭 필요하다면 정부와 국회, 또는 여·야 간 조율을 거쳐 질서 있게 진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일본 국민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일은 철저히 배제하면서, 정치적 야망에 사로잡혀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있는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를 정확히 타게팅해야 비로소 우리 뜻대로 극일을 이룰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여권 일부 인사들이 번갈아 제기하는 친일 시비 또한 적전분열을 일으키는 치졸한 짓이라는 점에서 자제돼야 할 것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