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시작한 지 근 두 달만에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수출을 허가했다. 이번에 수출허가된 불화수소는 삼성전자가 일본 기업을 통해 신청한 것으로, 허가 신청을 한 시점은 지난달 초순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지난 달 4일부터 수출 규제에 돌입한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소재 가운데 지금까지 두 가지 품목에 대해 일부 수출 허가를 내주었다. 포토 레지스트 두 건, 그리고 이번의 불화수소 한 건이 전부다. 3대 소재의 하나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아직 한 건도 수출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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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소재에서도 불화수소는 우리 정부와 반도체 제조기업들이 특히 관심을 갖고 지켜본 품목이었다. 일본이 군사 전용 가능성을 직접 거론한 품목이 불화수소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불화수소에 대해서는 쉽사리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제기됐었다. 불화수소 수출 허가가 이뤄진다면 일본 스스로 수출 규제의 명분으로 설정한 안보상 이유가 해소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일부 있었다.

불화수소를 둘러싸고 군사 전용 가능성이 거론된 이유는 이 물질이 핵무기 제조에 소요된다는 점이었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한국이 불화수소를 수입한 뒤 북한으로 빼돌렸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이는 수출 규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억지 주장이었다.

우리에게 고순도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꼭 필요한 품목이다. 반도체 제조업체는 웨이퍼(기판)에 일정한 모양대로 오려낸 포토 레지스트를 붙인 다음 불화수소를 이용해 나머지 부분의 표면을 깎아내는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한다. 이런 이유로 불화수소는 에칭(식각(蝕刻): 부식 작용에 의해 깎아냄)가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일본이 에칭가스 수출 허가를 내주었지만 이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대상이 에칭가스라 할지라도 이제 겨우 한 건 이뤄진 수출 허가를 기조 변화 움직임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청 두 달 만에 수출 허가가 이뤄졌다고 해서 앞으로도 주기가 일정하리란 보장도 없다. 불확실성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오직 일본 정부가 임의로 수출 허가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만큼 다음엔 어느 품목이 언제 한국으로 향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에칭가스 수출 허가의 이유로는 몇 가지가 거론된다. 가장 먼저 상정할 수 있는 것은 명분쌓기다. 한국이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를 문제 삼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키로 한 것을 염두에 두고 에칭가스 수출 허가가 이뤄졌을 것이란 얘기다. 즉, 다른 많은 나라들에게 하듯 정상적인 심사 절차를 거쳐 허가를 하고 있을 뿐 수출 규제를 시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칠 근거를 남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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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차후 일본이 몇 건의 수출 허가를 근거로 내세우며 필요시 자유무역 원칙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란 예상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상정 가능한 이유는 일본 수출기업의 실적 부진 만회다. 일본 재무성이 최근 발표한 올해 7월 무역통계에 의하면 한국으로 수출된 불화수소의 양은 479t으로 전월 대비 83.7%나 줄어들었다. 이에 자국의 불화수소 생산업체들이 경영상 어려움을 호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다수 언론들은 진작부터 그에 대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한국 수입기업들의 수입선 다변화 및 자급 노력이다. 우리 반도체 제조사들은 이미 대만과 유럽 등의 업체들과 다각도로 접촉하면서 수입 다변화 노력을 펼치는 한편 국내 중소기업을 통한 자급을 추구하고 있다. 이미 소재 공급처로서의 일본에 대한 신뢰가 상당 부분 훼손됐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장기적으로 일본 수출 기업들의 손실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본 정부가 조금씩 태도를 바꾸려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에칭가스 수출 허가로 인해 삼성전자는 일단 급한 불은 끈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반도체 시장 조사업체인 디램익스체인지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가 2달 반 정도 사용할 분량의 에칭가스를 재고로 보유하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하지만 전략상 중요한 업무 기밀 사항인 관계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반도체 소재를 지니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재고 부품의 분량을 두고 엇갈리는 전망들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일본의 수출 규제와 그로 인해 촉발된 한국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결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두 나라 외교 당국자들이 지난 29일 서울에서 만났다. 협의 당사자들은 양측 외교부의 국장급 간부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 측은 수출 규제의 즉각 해제를, 일본 측은 지소미아 종료 철회를 각각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양측은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채 협의를 마쳤다.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당국에 따르면 양측 대표는 당분간은 실무급 협의를 이어간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에 따라 다음 달엔 우리측 인사가 일본을 방문해 협상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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