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옥의 나이스한 세상] 디플레이션 우려, 묵살해도 좋은 걸까
[박해옥의 나이스한 세상] 디플레이션 우려, 묵살해도 좋은 걸까
  • 박해옥
  • 승인 2019.10.01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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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경제와 관련된 담론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 ‘공포’다. 한동안 ‘R의 공포’와 ‘D의 공포’라는 말이 나돌더니 요즘 들어서는 ‘M의 공포’라는 말도 심심찮게 거론된다. 이들 명칭은 각각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 마이너스의 영문 이니셜을 차용해 만들어졌다.

이 같은 말의 유행은 우리 경제가 그만큼 활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경기가 활기차게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이런 용어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리 만무하다. ‘공포’는 우리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터라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일본은 아직도 20년 장병(長病)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경제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장기간 이어져온 제로 금리도 모자라 최근 들어서는 마이너스 기준금리를 채택하고 있고, 경제대국이면서도 도쿄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최저임금 수준을 시간당 1000엔 미만으로 묶어두고 있다. 노동 공급을 늘리되 노동 비용은 줄여 산업생산을 증대시키려는 게 일차적 목표일 것으로 분석된다. 외신들을 통해 일자리가 남아돈다는 이야기가 들리곤 하지만 안정적인 고임금 일자리 창출은 일본에서도 난제로 남아 있다.

한번 쇠잔해진 경제 체력을 되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본은 지금도 우리에게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주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부쩍 커진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지난 수년간 이어져온 디플레 우려와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 지표를 통해 확인된다. 대표적인 지표는 역시 소비자물가지수다. 이 지수가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이 저성장과 맞물려 있다는 점 또한 개운치 않은 사실이다.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 수준에 크게 못 미치고 있고, 저성장이 고착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의 저물가가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시사한다. 저물가 현상이 정부 주장대로 공급측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비와 투자를 망라한 내수 부진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뜻이다.

사실 지난 8, 9월 연속해서 나타난 소비자물가의 마이너스 상승(전년 동월 대비)은 일시적 요인에 의해 갑자기 생긴 현상이 아니다. 이미 올해 초부터 소비자물가는 0%대 상승률을 보이며 그전부터 잠재돼온 디플레 우려를 꾸준히 자극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소비가 정체된 가운데 경제의 활력이 약해져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투자 부진도 심각하게 나타났다. 수출실적이 급격히 악화된 가운데 내수마저 오그라들면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얘기다.

[그래픽 = 연합뉴스TV/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TV/연합뉴스]

주지하다시피 저물가, 특히 물가의 마이너스 상승세 지속은 경제 활력을 치명적으로 떨어뜨리는 위험인자다. 물가가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는 상황에서는 돈을 가진 사람들도 소비를 미루기 마련이다. 자고 나면 물가가 떨어지는데 서둘러 물건을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제조기업의 재고를 높이고 생산과 고용을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생산 감축은 물건을 만들어 팔수록 손해보는 상황 탓에, 고용 감축은 기업 소득 감소 탓에 자연스레 이뤄진다. 그야말로 멀지 않은 과거의 일본처럼 국가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황이 현실화된다는 의미다.

물가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이상적인 현상은 완만한 상승세의 지속이다. 이는 건강하고 활력 있는 경제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연준)나 한국은행이 공히 물가 상승률 목표치를 2%로 잡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그 정도의 선에서 물가가 유지되도록 통화량을 조절하는 것, 다시 말해 물가 안정을 이루는 것이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제1 목표라 할 수 있다. 경기 부양은 오히려 그 다음이다.

디플레 도래는 현행 경기 사이클의 저점을 더욱 길게 밀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아직 우리 경제가 경기 저점을 향해가고 있는지, 이미 저점을 통과해 확장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경기 전환점에 대한 논의는 경기지표를 포함한 여러 경제 지표를 종합한 뒤 전문가 집단의 심도 있는 관찰을 거쳐 이뤄져야 한다. 긴 시간에 걸쳐 나타나는 지표들의 흐름도 면밀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중요하고도 당장 필요한 것은 위험 신호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다. 그에 앞서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내려져야 한다. 한국 경제의 활력을 잃게 하는 요인은 다중적일 수 있다. 보호무역주의 흐름과 그로 인한 글로벌 경기 침체 등 대외 요인은 물론 내부 요인도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중 대외 요인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측면을 지닌다. 감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다만 내부 요인은 우리의 역량과 의지로 웬만큼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인 만큼 적극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살펴봐야 할 것 중 하나가 정책적 오류의 가능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대상이 말 많고 탈 많은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 정책이다.

이들 정책의 실천목표는 누가 봐도 경제 활성화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경제주체들을 정부가 컨트롤하면서 경제 전반을 통제하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 등 세계 주요국들이 경제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각종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두 정책 모두 질환에 걸린 한국 경제를 치유하기 위해 취해진 처방임엔 틀림이 없다. 진보정권답게 성장보다는 분배에 더 많은 무게를 싣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처방 시점과 실천방법, 약효의 강도가 적절했는지에 있다. 늦었지만 정책 목표에 근접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중간점검도 필요하다. 그 필요성을 묵살한 채 자기암시를 주듯 “우리 경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만 되뇌는 것은 현실화되고 있는 각종 ‘공포’를 더욱 키워줄 뿐이다. 경제주체들의 심리를 관리하는 것 역시 경제정책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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