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가(家) 내부 분란의 불씨가 결국 밖으로까지 튀어나왔다. 설마설마하며 거론됐던 내분의 실체 일부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조양호 전 회장 사후 그룹의 경영권이 한동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던 관측을 뒷받침한 사건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의해 촉발됐다. 조 전 부사장이 한진그룹 신임 총수에 오른 조원태 회장이 선대 회장의 유훈에 어긋나게 그룹을 자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취지의 불만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TV/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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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전 부사장은 23일 법무법인 ‘원’을 통해 남동생인 조 회장의 경영 행태를 공개 비판했다. 법무법인이 발표하는 형식을 빌렸지만 발표문에는 조 전 부사장의 입장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입장자료문의 제목부터가 ‘한진그룹의 현 상황에 대한 조현아의 입장’이었다.

‘원’은 입장자료를 통해 “한진그룹은 선대 회장(고 조양호 회장)의 유훈과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면서 “(조원태 회장이) 상속인 간의 실질적 합의나 충분한 논의 없이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대규모 기업집단의 동일인으로 지정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조 전 부사장의 복귀 등에 대해 당사자와 어떠한 합의도 없었지만 합의가 있었던 것처럼 공표됐다“고 밝혔다.

이번 발표문 내용은 조 전 부사장의 조 회장에 대한 불만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구체적 불만의 사유는 자신의 경영 복귀 지연인 것으로 보인다. 불만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직접적 계기는 최근 단행된 한진그룹 임원 인사에서 조 전 부사장의 경영 복귀가 이뤄지지 않은 일인 것으로 짐작된다.

지난 11월 말경 한진그룹은 고 조양호 전 회장의 신임을 받았던 석태수 대한항공 부회장과 서용원 한진 사장, 강영식 한국공항 사장 등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조양호 전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석태수 부회장은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대표이사 사장직만 유지하기로 했다. 이로써 한진칼은 조원태 대표이사 회장, 석태수 대표이사 사장 체제를 갖추게 됐다.

당시 인사는 조원태 회장이 취임 7개월 만에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단행된 것이란 외부 평가를 받았다. 한진그룹은 인사 발표 직후 “신속한 의사 결정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임원 규모를 축소하고, 젊고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는 방향으로 세대 교체를 단행했다”고 설명했다.

회사 측 발표 내용과 별개로 시중에서는 조현아 전 부사장의 복귀가 이뤄지지 않은 점을 각별히 주목했다. 이는 조 신임 회장의 첫 인사에서 누나의 경영 복귀가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많았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조 전 부사장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자 언론들도 의아함을 나타내는 내용의 보도를 쏟아냈다. 조 전 부사장은 당시나 지금이나 경영 복귀에 대해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에서는 조 전 부사장의 이번 반격을 두고 향후 본격화될 경영권 다툼의 전초전이라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예상되는 싸움의 무대는 내년 3월의 주주총회다. 이때 사내이사의 임기가 만료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조 전 부사장 측이 입장자료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미리 과시하며 선제공격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이번 사태는 한진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이 순탄치 않음을 확인해주었다. 조원태 총수 체제로 굳어지는 듯했던 기류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의 경영권 승계 문제는 지난 5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원태 회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비쳐졌다. 당시 공정위는 정황상 판단에 의해 조원태 회장에 대한 동일인 지정 작업을 완료했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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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과정에서는 일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진그룹은 그 당시 내부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들면서 공정위에 총수 후보를 확정 통보하지 못한 채 시일을 끌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13일에야 뒤늦게 관련 서류를 공정위에 제출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총수가 누구라고 명기돼 있지 않았다. 조양호 회장 사후 경영권 승계 작업이 순탄하게 마무리되지 못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자 공정위는 조원태 회장이 현실적으로 한진그룹을 이끌 것이란 정황을 근거로 그를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동일인이란 공정거래법상의 용어로서 두 개 이상의 기업집단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자연인 또는 법인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총수라 부르는 이가 곧 동일인인 셈이다. 동일인을 누구로 할지를 결정하는 쪽은 그룹이다.

공정위가 그룹의 통보에 따라 동일인을 지정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총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친인척 등 측근들이 총수의 세력을 업고 부당하게 이권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즉, 총수 측근들에 대한 감시 강화가 동일인 지정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조현아 전 부사장의 입장 발표에 나타난 동일인 관련 불만은 지난 5월 당시의 일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조 전 부사장은 2014년 대한항공기 ‘땅콩 회항’ 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었다. 사건 발생 시점에 그는 대한항공 부사장을 맡고 있었다. 이후 3년 4개월이 지난 작년 3월 한진그룹 계열사인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직을 꿰차며 경영에 복귀했으나, 곧바로 동생 조현민 한진칼 전무의 ‘물컵 갑질’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다시 잠행에 들어갔다.

그 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봄 조현민 전무가 경영 일선에 복귀했고, 폭언·폭행 및 밀수 혐의 등으로 기소됐던 어머니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도 비상장 계열사인 정석기업 고문 등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조 전 부사장은 아직 이렇다 할 활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1월 한진그룹 임원 인사가 단행됐으나, 거기에도 조 전 부사장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업계에서는 그 일로 조원태 회장과 조현아 전 부사장 간 알력이 남아 있다는 분석이 다시 한 번 제기됐다.

현재 의결권 있는 보통주 기준으로 한진칼의 지분은 조원태 회장 6.52%, 조현아 전 부사장 6.49%, 조현민 한진칼 전무 6.47%, 이명희 고문 5.31% 등으로 구성돼 있다. 조양호 전 회장이 자신의 보유 지분을 배우자와 자녀들 각자에게 1.5대 1의 비율로 나누어 상속한데 따른 결과다.

한편 한진그룹 측은 이날 입장자료를 통해 조현아 전 부사장 측의 공격에 대한 반응을 나타냈다. 한진은 우선 논란 발생에 대해 송구스럽다는 입장을 전한 뒤 “회사 경영은 관련 법규와 주주총회, 이사회 등의 절차에 의해 행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논란으로 회사 경영의 안정성과 기업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룹으로서는 조심스럽게 원론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사태를 진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조 전 부사장의 입장 표명 내용으로 보아 갈등이 그룹 측 의도대로 원만히 해소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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