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대장동을 무대로 벌어진 일확천금 사건의 파장이 우리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 사건엔 특별한 관계로 얽힌 범상치 않은 인사들이 주연과 조연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민감한 소재인 부동산을 매개로 소자본을 투자해 단기간에 수천억원의 개발이익을 취했다. 거기에 편승해 상식 밖의 떡고물을 챙긴 이들도 있었다.

보통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 이 사건의 성격은 간단명료하다. 들인 노력에 비해 얻은 이익이 과했고, 보통사람들에게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성취가 너무도 쉽게 실현됐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같은 인식의 바탕엔 대장동에서의 역사가 반복된다 해도 비슷한 돈벼락이 자신들에겐 떨어질 리 없다는 범부들의 생각이 깔려 있다. 범법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혜택을 누렸다는 게 대장동 사건의 골자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더구나 그들이 누린 혜택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대장동 원주민들과 신축 아파트 입주자들이 나누어 누렸어야 마땅한 것들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화천대유와 개인 투자자 7명은 3억5000만원을 밑천 삼아 3년여 동안에 배당수익만 4040억원을 벌어들였다. 분양수익 등은 별개로 치고도 그렇다. 마당을 마련해준 곳은 성남시였다.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일이 관(官)의 기획 하에 발생한 것이다.

또 하나 화를 돋구는 것은 이 사건을 대하는 여권 인사들의 태도다. 기가 찰 정도의 비상식을 두고도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눈을 부라리며 타깃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 애쓰는 모습을 보면 이 사회에 과연 상식과 정의가 살아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합당한 자본과 노동의 투입 없이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사회는 결코 정상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장동 사건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정 세력에 한할망정 불로소득이 쉽사리 용인되는 사회에서는 정직한 노동이 바보짓으로 여겨질 수 있다. 정의당은 브리핑에서 “대장동 개발특혜 의혹은 땀 흘려 일하는 시민들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비판엔 불로소득이 횡행하는 사회는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불평등 압력이 사회발전의 동인이 된다’는 좌승희씨의 주장이나 사회기능론을 굳이 소환할 필요도 없다. 한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려면 땀 흘려 얻은 능력을 존중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정비돼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토대로 흘린 땀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신뢰가 쌓일 때라야 사회 발전이 가능해진다. 그게 곧 경제적 자본 못지않게 중요한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정유라·조민씨 사건을 연이어 접하면서 사회 정의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는 아빠 찬스, 엄마 찬스 등 각종 찬스를 업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정직하게 살아온 많은 부모들은 자괴감을 갖게 됐고, 그런 부모를 둔 여염집 청년들은 땀의 가치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

그러던 차에 터진 대장동 사건은 그 회의를 비웃음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건전한 성취동기가 사라지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성취동기가 하나 둘 사라지는 쪽으로 변모해왔다. 집 가진 자, 큰 기업을 운영하는 자, 공부 잘 하는 자 등 무언가 성취를 이룬 이들을 적대시하면서 정책적으로는 성장 담론을 외면한 채 분배의 가치만 앞세워온 게 원인이었다. 그 기저엔 불로소득의 일반화가 자리하고 있다.

불로소득의 일반화를 대변해주는 사례는 사방에 널려 있다. 일례로 지금 우리 주변엔 퇴직 이후 실업수당(실업급여)을 받기 위해 재취업을 고의로 미루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매달 받는 실업수당이 재취업을 통해 벌어들일 수입과 엇비슷해진 것이 직접적 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선 실컷 놀면서 실업수당을 챙기는 쪽을 선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선택을 하는 게 나쁘다기보다 제도나 정책이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실업급여 지급 수준 인상, 수급 기간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최저임금 인상에 의해 실업수당 지급 하한선도 자연스레 올라갔다.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개발지구. [사진 = 연합뉴스]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개발지구. [사진 = 연합뉴스]

분배 정책의 오류도 성취동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이는 현 정부 들어 1분위 가구(소득 하위 20%)의 소득구조 변화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구조 변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근로소득의 감소와 불로소득인 이전소득의 증가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 자료들을 살펴보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1분위 가구의 근로소득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정부 지원이 주를 이루는 이전소득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런 흐름이 4년여 동안 이어지면서 땀 흘려 일해 번 돈보다 불로소득이 소득의 주를 이루는 현상이 나타났다.

통계청 발표 결과 표본에 1인 가구가 포함되기 직전 해인 작년 1분기의 1분위 가구 월평균 소득은 149만8000원이었다. 이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전소득(69만7000원)이었다. 반면 근로소득은 그보다 훨씬 적은 51만3000원이었다. 이전소득과 근로소득의 역전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나타난 특징적 현상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해인 2013년 1분기의 1분위 가구 이전소득은 38만9500원이었고 근로소득은 이보다 많은 54만6200원이었다.

이전소득 증가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근로소득이 줄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1분위 가구의 불로소득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불로소득에 대한 의존도 증가는 국가경제는 물론 개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불로소득은 혜택 당사자의 자립능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불로소득의 일반화가 초래하는 부작용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결정적 부작용은 따로 있다. 열심히 일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허탈감과 상대적 박탈감, 상실감을 안겨준다는 점이 그것이다.

불로소득이 악이라면, 복지 차원에 한정할 경우 불로소득은 필요악일 수 있다. 그 필요악은 가능한 한 제한적으로 허용돼야 한다. 그래야 개개인의 성취동기가 손상되지 않으면서 사회 전체가 역동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그 기본원리는 ‘노 페인, 노 게인’(No pain, no gain)이어야 한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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