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한국 경제가 ‘회색 코뿔소’와 조만간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회색 코뿔소가 위협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경고음들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회색 코뿔소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띄어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위험을 뜻하는 경제용어다. 이 용어는 미국의 정책분석가인 미셸 부커 전 세계정책연구소장이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인 다보스 포럼에서 처음으로 사용했고, 이후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경제적 위험을 뜻하는 또 하나의 용어로는 ‘블랙 스완(검은 백조)’이 있다. 이는 출현을 예상하기 어려워 불쑥 나타나곤 하지만 일단 출현하면 경제에 큰 충격을 주는 위험을 의미한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오른쪽 두번째)이 경제 전문가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고승범 금융위원장(오른쪽 두번째)이 경제 전문가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부커 전 소장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이 블랙 스완에 의해 발생했다는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를 반박한 바 있다. 위험에 대한 경고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등이 그 신호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해 금융위기가 초래됐었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니란 얘기다.

한국 경제가 회색 코뿔소의 공격 가능성에 노출돼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관계와 학계, 경제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오고 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최근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경제·금융 전문가 간담회에서 회색 코뿔소를 거론했다. 고 위원장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긴축 가속화 ▲코로나19 사태 ▲중국의 경기 둔화 ▲미·중 갈등 등의 이슈가 올해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에 영향을 줄 것이라 전망했다. 그는 잠재적 위험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서 이들 요소를 나열했다. 소위 회색 코뿔소들이 곧 우리 경제를 뒤흔들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한 셈이다.

고 위원장은 회색 코뿔소의 침입에 대비해 시급히 해야 할 일로 특히 가계부채 관리를 통한 금융불균형 완화를 꼽았다. 그는 간담회에서 “금융불균형 완화 기반을 마련했지만 아직 할 일이 많다”며 가계부채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회색 코뿔소 출현이 몰고 올 부정적 영향과 관련, 김영익 서강대 교수는 글로벌 자산가격 폭락과 경기침체의 악순환 가능성을, 신용상 한국금융연구원 금융리스크연구센터장은 자영업자 대출 문제와 비금융권발 리스크를 거론했다. 서영수 키움증권 이사는 부동산 가격 조정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금융기관들의 충당금 적립을 권고했다.

경제 전문가들이 회색 코뿔소를 말할 때 공통으로 꼽는 미국의 긴축 강화는 우리에게 이미 현실화돼 있는 위험 요소다. 연준의 정책 변화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를 끌어올리고 결과적으로 국내 가계부채 부실화와 부동산·주식 등 자산 가격의 급격한 하락을 유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이들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퍼펙트 스톰’으로 칭하면서 그 가능성을 우려했다.

부동산 거품 붕괴와 가계대출 부실화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집값 상승기에 ‘영끌’ 대출로 집을 산 이들은 자산 거품이 꺼지고 금리가 오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헤어나기 힘든 이중고에 빠져들게 된다.

최근 국내에서는 대출 규제 강화와 금리 인상 영향으로 가계대출 증가세가 주춤한 상태에 돌입했지만, 이미 그 규모는 1800조원 안팎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9월 현재 판매신용을 제외한 가계대출 규모만 해도 1744조7000억원(한국은행 집계)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준의 긴축 강화는 신흥국 경제 전반에 걸쳐 자본 유출을 자극할 요인으로도 지목된다. 이에 국제통화기금(IMF)은 신흥국들을 향해 미국의 긴축에 대비할 것을 주문하면서 “연준이 금리를 빠르게 올리면 수요와 교역이 둔화되고 신흥시장에서는 자본 유출과 통화가치 하락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도 우리가 조심해야 할 회색 코뿔소 중 하나다. 중국의 성장세는 최근 들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1분기에 18.3%(전년 동기 대비)의 성장세를 자랑했던 중국 경제는 그 다음 분기부터는 7.9%, 4.9%, 4.0%의 저조한 성장률을 기록했다. 저조한 성장률 자체보다 추세가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중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도 그리 밝지 못하다. 세계적 투자은행들인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은 올해 중국의 성장률 전망치로 각각 4.3%와 4.9%를 제시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온 중국의 성장 둔화는 전세계에 연쇄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중국의 성장률이 1%포인트 하락하면 한국의 성장률은 0.5%포인트 하락 압력을 받게 된다고 추정했다.

더구나 지금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 경제 및 한국 경제에 얼마나 더 악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이들 악재에 더해 장기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양상도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가까이 다가온 회색 코뿔소의 공격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가계부채의 안정적 관리, 긴축 전환기 자영업자 등 취약차주의 충격 최소화, 금융권 위험관리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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