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인플레이션이 장기화 양상을 보이자 미국에서 중앙은행 책임론이 부상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은연중 연방준비제도(연준)를 압박하는 발언을 한 것도 연준 책임론 이슈를 부각시키는데 일조했다.

논란을 촉발한 직접적 계기는 지난 11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노동부의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발표였다. 공개된 전년 동기 대비 4월 CPI 상승률은 8.3%였다. 전월 대비 상승률은 0.3%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및 전월 대비 상승률 각각은 3월에 비해 0.2%포인트, 0.9%포인트 낮아진 것이었다. 미국의 3월 CPI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로는 8.5%, 전월 대비로는 1.2%를 기록했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올해 3월에 정점을 찍고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 아닌가 하는 희망적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가가 오를 대로 올랐다는 인식이 일부 나오던 차에 한 차례이긴 하지만 상승률이 하락했다는 점에 주목한 결과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사진 = UPI/연합뉴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사진 = UPI/연합뉴스]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비롯한 미국 매체들은 물가상승률이 8개월 만에 처음으로 꺾이는 모양새를 나타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월 대비 상승률이 8개월래 최저라는 점 또한 정점 통과 견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향세에 동의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속되는 인플레이션에 실망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4월 물가지수 상승률이 예상치를 웃돌았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다. 시장이 예상한 수치는 8.1%에 머물러 있었다. 8.2% 상승을 예상하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전망치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두 번째 이유는 4월 근원 CPI의 전월 대비 상승률이 3월보다 높아졌다는 점이다. 4월 근원 CPI는 전년 동기 대비 6.2%, 전월 대비로는 0.6% 상승했다. 3월에 기록한 각각의 상승률은 6.5%와 0.3%였다.

노동부의 발표가 있고 난 뒤 나타난 시장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못했다. 채권 금리가 급등하고 주가지수 선물은 개장 전 하락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뉴욕증시의 주요지수들은 CPI 발표 당일 일제히 하락했다. 각각 전장에 비해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326.63포인트(1.02%),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65.87포인트(1.65%), 나스닥 지수는 373.43포인트(3.18%) 하락했다.

이는 투자자들이 정점 통과론보다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당초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음을 말해준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미국 내에서는 연준의 대응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목소리가 하나 둘 나타났다. 뉴욕 타임스는 CPI 발표 하루 전 보도를 통해 연준이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물가 잡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연준 안팎에서 나온다고 전했다.

자성론자의 한명인 랜들 퀄스 전 연준 부의장은 연준이 작년 9월 이후부터 완화적 정책을 적극 철회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퀄스 전 부의장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작년 11월에 제롬 파월 의장의 유임을 결정한 것이 연준의 미래 리더십을 불투명하게 했고, 그런 상황이 연준의 재빠른 인플레이션 대응을 어렵게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연준은 작년 11월에 가서야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에 나섰고, 그런 행보를 수개월 간 이어가다 올해 3월에 이르러서야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했다. 이처럼 대응이 늦어진 탓에 미국 내에서의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됐다는 게 비판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물론 연준의 지난 행보가 불가피하게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당시로서는 물가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런 의견을 말하는 연준 관계자들은 지난해 초의 인플레이션은 반도체와 자동차 등 일부 업종에서 나타난 공급망 혼란 탓이었다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이 식품류와 임대료 등 다른 분야로 확산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연준이 정책 행보를 시장에 미리 공언한 점도 통화정책의 빠른 선회에 지장을 준 것으로 지적됐다. 연준은 지난해에 고용시장이 상당 수준으로 회복될 때까지 제로금리를 유지하면서 채권 매입(양적완화)을 지속하겠다고 밝혔었다. 연준은 또 긴축을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채권 매입량 감축을 완전히 이행한 뒤 기준금리를 올리겠다고 공언했었다.

이를 두고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는 지침이 만들어지고 나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정책을 전환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런 사전 지침들로 인해 연준의 통화정책 선회가 장기간의 과정을 거쳐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 동안 파월 의장에 의해 주로 공개된 연준의 사전 지침은 시장의 급격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으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연준이나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심화되고 장기화되자 연준의 조심스러웠던 행보가 뒤늦게 도마 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연준의 정책결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FOMC 회의에서는 위원 19명이 토론에 참여하고 그중 12명이 투표권을 행사한다. 월러 연준 이사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위원 간 이견을 좁혀가는 과정을 통해 타협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정책 변화가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바이든 미 대통령은 노동부의 CPI 발표가 이뤄진 직후 성명을 내고 “미국 경제에 있어서의 최대 위협은 인플레이션”이라며 “연준이 (그 사실을) 알고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4월 들어 인플레이션이 완화된 것은 고무적이지만 물가가 높다는 사실은 그대로”라며 그 같이 말했다. 이 발언의 배경엔 지속되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덜어내면서 연준에 압박을 가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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