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루나와 테라 사태 이후 가상화폐 투자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봇물 터진 듯 나오고 있다. 실물 자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가상화폐는 거래 수단으로 적절치 않으며 단지 투자수단으로만 기능한다는 점이 그런 주장의 주된 논거다. 경고성 주장들은 가상화폐가 개인의 투자 손실을 넘어 한 나라의 금융안정성을 흔들 수 있다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4일(이하 현지시간) 보고서를 통해 기관투자가들의 가상화폐 투자를 경계하는 주장을 펼쳤다. 로이터통신에 의하면 이날 ECB는 전통적인 금융과 가상화폐의 상관성이 증가함에 따라 구조적 위험이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ECB는 또 기관의 가상자산 투자 확대가 자본을 위험에 노출시킴으로써 투자자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상화폐 관련 데이터 부족에 의한 위험성도 거론했다. ECB는 가상화폐 시장의 데이터 부족이 금융 위험성에 대한 평가를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거래소와 데이터 제공업체가 제시하는 자료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하면서 주의를 당부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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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B는 특히 개인의 가상화폐 투자는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가상화폐 거래에 대한 새로운 규제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날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다보스 포럼)에서도 가상화폐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가상화폐는 실제 화폐가 아니다”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주열 전 한국은행 총재 등이 “내재가치가 없다”며 경고 목소리를 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프랑수아 빌르투아 드갈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는 가상화폐가 이미 시민들의 신뢰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상화폐는 믿을 만한 지급수단이 아니다”라며 “누군가가 가치를 담보해주고 교환수단으로 기능해야 하는데 가상화폐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한 엘살바도르를 향해 유로화 사용을 권고했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가 변동성이 커 위험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세타푸트 수티와르나루에푸트 태국 중앙은행 총재는 “가상화폐는 교환 수단이라기보다 투자 수단”이라고 단언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크리스티나 게오르기에바 총재도 “비트코인은 코인이라 불리지만 화폐가 아니다”라며 “안정적인 가치저장 수단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가상화폐가 실물 자산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거래 과정이 디지털 시대의 다단계 사기구조와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실재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투자를 해야만 돌아가는 구조라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이어 가상화폐는 정부가 가치를 보장하는 디지털화폐(CBDC)와는 다른 물건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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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인식이 확산되는 것과 함께 가상화폐 시장 규모는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 초만 해도 3000억 달러(약 379조원)에 못 미치던 시장 규모는 지난해 11월 2조9000억 달러(약 3665조원)까지 오르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서서히 하락하더니 테라와 루나 사태를 계기로 50% 이상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11월 6만8990달러(약 8719만원)를 호가하던 비트코인 가격은 25일 현재 3만 달러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가상화폐 가치의 폭락은 애꿎은 피해자 양산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우리 정부·여당은 비상대응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지향점은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일정한 규제 하에 영업을 하도록 하고, 그로 인해 투자자 보호가 이뤄지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업권법(業權法) 제정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후보자 시절 ‘디지털자산기본법’이란 이름의 업권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24일 열린 당정 간담회에서 “중요한 것은 투자자 보호”라면서 올해 하반기에 투자자 보호를 위한 국회 청문회를 개최토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 소속인 윤재옥 국회 정무위원장은 피해 발생시 투자자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안 된다는 입장을 드러내며 기본법 마련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윤 위원장은 기본법 마련 이전에라도 금융 당국이 거래소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요구에 대해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가상자산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이나 소비자 이익, 통화경제정책 등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기본법 제정 논의에 적극 참여할 뜻을 밝혔다. 그는 국제공조 강화의 중요성을 거론하면서 제도화 이전에라도 사정기관 등과 협력해 가상자산 불법거래 방지 노력을 지속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는 루나와 테라 사태를 계기로 국내 가상화폐 시장을 점검하고 투자자 보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됐다. 모임에는 당에서 정책위와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 등이, 정부 쪽에서는 김 부위원장과 금융감독원·검찰청·경찰청·공정거래위원회 소속 국장급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당정 관계자 외에 업비트 등 국내 업체 대표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가상화폐 거래 업체의 활동 범위 등을 규정하는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안은 현재 국회 정무위에 계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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