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원자력발전소(원전)의 유럽 진출 가능성이 열렸다. 그 전초기지가 되어줄 곳은 폴란드다. 우리 원전산업이 폴란드를 발판 삼아 유럽 시장을 개척하면서 새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최근 서울에서 진행된 한국-폴란드 정부 간 한국형 원전 공급 관련 양해각서(MOU) 체결은 그 불씨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양해각서의 주 내용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폴란드의 민간 발전사 제팍, 폴란드전력공사가 퐁트누프 원전사업을 위해 협력한다는 것이었다. 정부 간 양해각서 체결 직후 한수원과 제팍, 폴란드전력공사 관계자들은 사업 관련 협력의향서(LOI)를 교환했다. 의향서는 말 그대로 당사자들의 사업 협력 의지를 담은 문서다. 따라서 협력 의사를 확인했을 뿐 아직은 한국형 원전의 폴란드 진출이 100% 보장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해각서 체결식에 우리나라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폴란드 부총리 겸 국유재산부 장관이 참석했다는 점이 기대를 모으게 한다. 양국 주무 장관이 사업 당사자 간 협력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지원한다고 약속함으로써 사업 성공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건설한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바라카 원전 2호기. [사진 = 연합뉴스]
우리가 건설한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바라카 원전 2호기. [사진 = 연합뉴스]

이번의 협력의향서가 본계약으로 이어진다면 한국형 차세대 원전인 APR1400의 수출길이 13년 만에 열린다. 더욱 의미심장한 점은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 등에 국한돼 있던 우리의 원전 수출 시장이 획기적으로 넓어질 기회를 잡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사업이 성과를 거둔다면 한국형 원전은 유럽 무대에서 미국과 경쟁할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 폴란드 진출을 계기로 다수 유럽 국가들에게 한국형 원전의 우수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입증하고 홍보할 수 있어서이다.

시점도 꽤나 좋은 편이다. 우리가 탈원전 정책을 실험하느라 주춤하는 사이 원전 수출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인 러시아와 중국은 때마침 유럽 등 국제사회와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중국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서방과 갈등을 빚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에너지 공급난이 심화되면서 원전 의존도를 높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점도 우리에겐 호재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취급하려는 기류를 강화시켜주었다. 이런 기류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단 건설만 되면 원전은 안정적으로 값싼 에너지를 공급해줄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특히 유럽에서는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공급이 불안정해지는 바람에 원전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기류가 강하게 형성됐다. 유럽연합(EU)이 택소노미(녹색분류 체계)에 원전을 포함시킨 것도 기류 변화를 대변해준다. 택소노미 체계에 원전을 포함시켰다는 것은 원자력발전을 청정 에너지 생산 작업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신고리 원전 3, 4호기(오른쪽부터). [사진 = 연합뉴스]
신고리 원전 3, 4호기(오른쪽부터). [사진 = 연합뉴스]

폴란드의 경우도 지금까지 주로 의존해왔던 석탄 발전의 비중을 줄이고 대신 그 빈자리를 원전으로 채움으로써 탄소 중립 목표에 한 발 더 다가서려 하고 있다. 최근의 잇따른 원전 프로젝트 입안은 그런 움직임의 일환이다. 폴란드는 2040년까지 온실가스를 30% 감축한다는 국가적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최근 미국이 원전 건설을 앞세워 유럽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그 같은 환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앞서 우리는 폴란드 정부 주도의 원전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려 했으나 미국 기업과의 경합에 밀려 실패를 맛보았다. 이번 MOU와 LOI는 그 직후 폴란드에서 민간 주도로 진행되는 별개의 원전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된 것이다.

구체적 협력 내용은 폴란드 퐁트누프에 한국형 원전 2~4기(기당 1400MW 규모)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양국 간 협약서에는 APR1400을 건설한다는 표현이 명기돼 있다. 원전 1기당 건설비가 5조~7조원대로 추정되는 만큼 본계약이 이뤄질 경우 전체 수주액은 10조~28조원에 이를 것으로 기대된다. 이게 또 하나의 시작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질 수 있다.

원전산업은 설계와 건설은 물론 장기간에 걸친 관리와 인력 지원, 부품 공급 등을 토대로 60년 이상의 사업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분야다. 최근 들어서는 폐원자로 해체 기술까지 원전 사업의 주기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폴란드 원전 수주를 범국가적 사업으로 설정한 뒤 가능한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당장은 한수원 및 한국전력공사를 상대로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원전 기술과 관련해 제기한 지적재산권 소송 리스크를 해소해야 한다. 이 소송이 한국형 원전의 두 번째 유럽 진출 시도를 방해할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탈원전 정책 탓에 훼손된 국내 원전산업의 생태계를 빠르게, 온전히 복원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 우선은 국내에서 원전산업의 전 주기를 커버하는 기술과 운영 체계를 완비하고 우수한 인력을 양성해야 한국형 원전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입법·행정을 망라해 범국가적으로 원전산업 지원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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