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마침내 완화 국면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분위기 변화는 복수의 지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8개월 만에 처음으로 7%대(7.7%)로 내려간데 이어 15일(이하 현지시간)엔 10월 생산자물가지수(PPI)도 유의미하게 하락했음을 알리는 발표가 있었다.

노동통계국을 산하에 두고 있는 미국 노동부는 이날 미국의 10월 PPI가 전월 대비 0.2%, 전년 동기 대비로는 8.0%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가 나오자 시장은 또 한 번 환호했다. 발표치가 시장의 예상치(전월 대비 0.4%, 전년 동월 대비 8.3%)보다 낮다는 점이 우선 시장을 안도시켰다.

시장은 근원PPI가 긍정적 흐름으로 보였다는 점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10월 근원PPI는 전월 대비 0.2%, 전년 동월 대비 5.4%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다.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연간 물가지수의 흐름이다. 미국의 전년 동기 대비 PPI 상승률은 6월 이후 눈에 띄게 하락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1월 10.1%, 2월 10.4% 이후 3월에 11.7%로 정점을 찍은 월별 PPI 상승률은 6월(11.2%)이 지나면서 9%대, 8%대로 순차적 하락 흐름을 보였다. 그러더니 9월 8.4%에 이어 지난달엔 8.0%를 기록하며 7%대 진입을 바라보기에 이르렀다.

근원PPI(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지수)의 연간 흐름도 비교적 긍정적이다. 올해 미국의 월별 근원PPI 상승률은 3월에 7.1%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더디게나마 감소세를 유지하며 7월 들어 5%대(5.8%)로 내려갔다. 이후엔 두 달 연속 5.6%의 상승률을 기록하더니 지난달엔 또 한 번 단계를 낮춰 5.4%를 기록했다.

PPI는 도매물가로서 반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지수이고, 근원PPI는 계절적·돌발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생산자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지수다.

도무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던 미국 내 물가가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자 연방준비제도(연준) 관계자들의 발언 내용도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다. 연준의 목표 물가 2%에 도달하려면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물가의 흐름이 아래쪽을 향하고 있음이 지표를 통해 입증되자 긴축속도 조절 가능성을 내비치는 목소리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주목받은 이는 연준의 2인자로 꼽히는 레이얼 브레이너드 부의장이다. 그는 지난 14일 블룸버그 주최 행사에 참여했다가 가진 인터뷰에서 “조만간 금리인상 속도를 늦추는 게 적절할 것 같다”고 말했다. 속도조절론에 확실히 힘을 보태는 발언이라 할만 했다. 다만 그는 “우리가 금리 인상과 관련해 많은 일을 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남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고 말해 긴축 기조 자체는 유지돼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속도를 조절하되 당분간 금리 인상은 지속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부의장.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부의장.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그의 말이 방향 전환 시점이나 최종금리 수준과는 무관한 것이었지만, 시장은 다음 달 연준의 결정이 빅스텝(0.50%포인트 인상)일 것이란 전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의 PPI 상승폭 축소 소식이 더해지면서 긴축속도 조절론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이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FedWatch) 툴이다. 15일 기준 페드워치에 따르면 다음 달 연준이 빅스텝을 취할 확률은 80%대로 급상승했다. 반면 자이언트스텝 확률은 10%대로 낮아졌다.

패트릭 하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도 15일 행한 연설을 통해 “몇 달 안에”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하루 전 있었던 브레이너드 연준 부의장의 발언과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었다. 하커 총재는 통화정책이 충분히 제약적 상태에 진입했다고 밝혀 지금의 금리 수준이 최종금리에 가까이 도달해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하커 총재는 또 미국 소비자들이 지출을 줄이고 있고, 미국 내 주택 투자가 감소하고 있으며, 제조업 호황이 꺾이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는데 이 역시 긴축 완화 필요성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래피얼 보스틱 애틀랜타 연은 총재는 15일 연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광범위한 물가 상승률 완화를 알리는 지표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몇 줄기 희망이 있다”고 설명하긴 했지만 섣부른 기조 변화 기대를 자제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내용이었다. 보스틱 총재는 해당 글에서 미국 내 물가가 아직 목표치(2%)에 이르지 못했음을 상기시키면서 “더 많은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광범위한 물가 상승률’은 상품과 서비스 모두에 걸친 물가 상승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번 오르면 잘 내려가지 않는 끈적거리는 물가(Sticky Price)를 포함해 물가 전반이 하향 안정세를 띠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보스틱 총재는 또 통화정책이 물가 하락 효과를 내는데 걸리는 기간이 18개월 또는 2년일 수 있다는 일부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통화정책 운용시엔 물가상승률 외의 다른 경제지표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준 관계자들의 발언이 일치되지는 않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속도 조절론을 뒷받침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준 내부 분위기 변화는 향후에 추가로 이어질 연준 위원들의 공개발언을 통해 보다 뚜렷이 감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위원들의 공개발언은 다음달 FOMC 회의(13~14일)를 전후해 설정된 블랙아웃 기간(공개발언 금지 기간)이 시작되는 다음달 3일 이전까지 연이어 쏟아져 나온다. 이번 주 후반에만 해도 보스틱 애틀랜타 연은 총재,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은 총재, 로레타 메스터 클리블랜드 연은 총재,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은 총재(이상 17일), 수전 콜린스 보스턴 연은 총재(18일) 등등이 줄지어 공개 발언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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