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 야당의 입법권력 행사가 한계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긴축재정 기조 하에 제시된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을 헌법정신까지 저버려가며 마구 늘리려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마치 자신들이 집권이라도 한 듯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예산을 집행할 주체는 따로 있는데 편성 기조마저 자신들의 입맛대로 변경하려 드는 것은 지나친 처사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예결위) 예산안조정소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한 지난 17일까지 더불어민주당은 각 상임위원회 예비심사 과정에서 무려 8조원가량의 내년도 예산 증액을 밀어붙이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야 간에 일부 합의가 이뤄지면서 증액 규모가 다소 줄긴 했지만 639조원이나 되는 정부 예산안을 10조 가까이 더 늘리려 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윤석열 정부의 첫 번째 예산안은 사실 긴축을 입에 올리기 민망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추경분을 포함했을 때 전년치보다 줄었다지만, 본예산 기준으로 보면 전년 대비 5.2%나 늘어난 수치여서다. 국내총생산(GDP) 성장 속도를 감안하면 이 정도를 긴축예산이라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상식적인 야당이라면 예산 심사 때 불요불급한 항목이 들어 있는 건 아닌지, 각 항목에 거품은 없는지 살펴보고 정부를 엄히 추궁해 납세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노력하기 마련이다. 과거 예산 심사 과정에서 야당들은 대개 그런 모습을 보여왔다. 그게 예산 심사에 임하는 야당의 당연한 자세다.

지금처럼 야당이 앞장서서 예산 규모를 키우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우리 헌법은 국회가 예산을 증액하거나 새로운 항목을 신설하는 일을 금하고 있다. 피치 못할 상황을 만나 그렇게 해야 한다면 정부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헌법학자가 아니더라도 국회 예산 심사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를 헌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내년도 예산 심사에 임하는 민주당의 자세는 야당의 기본 역할에도, 헌법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정치성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 지방자치단체장 시절부터 보여온 선심성 예산 집행 성향이 민주당의 예산 심사 과정에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말인 즉, ‘민생 예산’이지만 그 속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내후년 총선을 겨냥한 선심성 예산이 아닌가 싶다. 의혹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하나 둘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재명표 예산’으로 불리는 지역화폐 지원 예산 5000억원과 쌀값 안정화 지원예산 1959억원, 재생에너지 지원예산 3281억원 등이다. 이밖에도 민주당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수소·연료전지 개발 및 신재생에너지 관련 예산을 정부안보다 3000억원 정도, 여성가족위원회에서는 스토킹피해자 지원 예산을 소액이나마 정부안보다 증액시켰다.

이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 정부 예산안에 없던 지역화폐 항목을 신설한 일이었다. 민주당은 당초 7050억 규모의 예산 항목 신설을 추진했으나 그 규모가 5000억원으로 줄어든 채 상임위 관문을 통과했다. 지역화폐 프로그램은 이재명 대표가 경기지사 시절부터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던 내용이다. 민주당의 예산 증액 및 신설 작업은 당 정책위원회 주도로 미리부터 사업 종류와 예산 규모를 설정한 뒤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계수조정소위원회 회의 모습. [사진 = 연합뉴스]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계수조정소위원회 회의 모습. [사진 = 연합뉴스]

정부 예산안에서 대통령실 관련 예산이나 정부조직 개편과 관련한 예산을 감정풀이하듯 삭감하려 드는 태도도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다. 용산공원 관련 예산 303억원과 행정안전부 경찰국 예산 6억3000만원 전액 삭감 시도가 그에 해당한다. 심지어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는 ‘청와대 활용 K-뮤직 확산’, ‘청와대 사랑채 개보수 및 안내센터 운영’ 예산 등에도 손질을 가해 총 59억원을 삭감한 채 결정 내용을 예결위로 넘겼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관련한 예산이 줄줄이 감액되자 여권에서는 ‘용산의 용자만 들어가도 칼질을 당한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거대 정당들이 예산에 정파적 이익을 개입시키는 것은 이번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민주당이 다른 현안들과 달리 예산 심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예산 심사에 있어서 큰 틀의 원칙만은 지켜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그 원칙 중 하나가 깐깐히 심사하되 예산 규모를 키우거나 새로운 항목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고물가와 고금리에 정부와 기업, 가계가 일제히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시점이다. 이전 정부의 방만한 재정 집행으로 재정건전성이 크게 훼손돼 있는 현실도 현 정부로 하여금 긴축의 길을 택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정·관계에는 연간 100조원 정도의 재정적자는 당연시하려는 기류가 조성돼 있는 것 같다. 그 결과 우리의 국가채무 규모는 이미 1000조원을 넘어서게 됐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누적 국가채무가 660조 수준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그 증가 속도가 최근 수년래 얼마나 빨라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경제 규모의 성장세를 크게 넘어서는 나랏빚의 증가 속도다. 가계로 치면 소득은 거의 늘지 않는데 빚만 빠르게 늘어가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지출예산을 깎기는커녕 10조 가까이나 늘리려 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그런 행태는 담세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고 느끼는 다수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할 뿐이다. 거대 야당이 의석수를 앞세워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이를 저지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설사 법정기간 내에 예산안이 국회 통과 절차를 완료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부가 예산 증액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상적이기로 치면 정부가 준예산 집행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에 미리 그런 의지를 분명히 천명하는 일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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