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통령 지시에 의해 공공요금 인상 속도를 조절하기로 했다. 가능한 한 올해 상반기가 끝날 때까지는 요금 인상을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용산에서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면서 주요 공공요금을 상반기 중엔 최대한 동결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취약계층 지원에 힘쓰며 요금 인상폭과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취지였다.

서울시도 화답했다. 그 덕분에 4월로 예정돼 있던 지하철과 버스 요금의 인상이 미뤄지게 됐다. 중앙정부가 지방교부세 추가 지원 등을 거론하며 당근책을 제시하자 입장을 누그러뜨린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서울시는 중앙정부의 지하철 운영적자 보전이 없을 경우 지하철 요금을 버스 요금과 함께 300~400원씩 올리기로 했었다. 앞서 서울시는 택시요금을 기본요금, 거리·시간당 요금 등 전반에 걸쳐 크게 올린 바 있다.

정부의 방침 전환에 따라 봄으로 예정돼 있던 서울 버스·지하철 요금과 전기·가스 요금 동반 인상이 하반기로 분산 이전될 가능성이 커졌다. 고금리·고물가에 고통을 겪어온 서민들로서는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셈이다.

비상경제민생회의 모습. [사진 = 연합뉴스]
비상경제민생회의 모습. [사진 = 연합뉴스]

하지만 이번 결정은 일찌감치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 그간 정부가 유지해온 공공요금 단계적 인상 기조가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갑작스레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 첫째 이유다. 전달에 이어 또 한 번 ‘난방비 폭탄’ 고지서가 날아드는 시점에 맞춰 임기응변식으로 정책 기조를 전환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비판이자 지적이다. 정부도 비판을 충분히 예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요금의 동시다발적 인상이 가져올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고육책을 택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정부의 최근 움직임은 요금 인상을 차기 정부로 넘기는 등의 책임전가 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믿어진다.

지금 우리 경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정적인 경로를 밟아가고 있다. 각종 지표가 그런 현실을 보여준다. 먼저 지적할 것이 인플레이션의 장기화 조짐이다. 물가 인상폭이 점차 작아지는 디스인플레이션 국면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는 게 우려의 핵심이다. 지난달의 경우엔 인플레 폭이 오히려 전달보다 0.2%포인트 증가해 5.2%로 올라서는 일까지 벌어졌다. 디스인플레 기조마저 흔들리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들게 하는 집계 결과였다.

에너지의 국제거래 가격이 다시 상승하고 있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그 바람에 우리의 무역수지를 악화시키는 주범인 에너지 수입액은 전보다 큰 폭으로 늘어났다. 이달 상순(1~10일) 우리나라의 원유 및 천연가스 수입액은 1년 전보다 각각 44.9%, 86.6% 증가했다. 에너지 수입액 증가는 사용량 증가가 아니라 단위가격 상승에 주로 기인한 것이다.

서울지하철 이용객들. [사진 = 연합뉴스]
서울지하철 이용객들. [사진 = 연합뉴스]

에너지 가격의 가파른 상승은 국내 물가 전반에 상승 압력을 높이게 된다. 고금리에 고물가까지 장기화되면 국내 소비도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악영향은 설비투자를 포함하는 내수 전반으로 번지고, 이는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이를 반영한 듯 기획재정부는 17일 발간한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을 통해 ‘경기 둔화’란 진단 결과를 내놓았다. 정부의 공식적인 경기 둔화 진단은 코로나19 팬데믹 후유증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그린북은 경기 둔화 진단의 원인으로 고물가로 내수 회복 속도가 느려진 점, 수출이 부진하고 기업심리가 지속적으로 위축돼온 점 등을 지목했다.

수일 전 나온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수정 경제전망’도 궤를 같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KDI는 올해 상반기 우리 경제 성장률이 기존 전망치보다 0.3%포인트 낮은 1.1%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행히도 연간 성장률 전망치는 하반기 전망치가 기존(2.1%)보다 올라가는 바람에 1.8%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연간 1.8% 목표가 달성된다 하더라도 잠재성장률 추정치(2%)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어서 심각성을 지니기는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각종 지표가 말해주듯 우리 경제는 지금, 어느 때보다 춥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모든 경제주체들의 활동이 위축되기 쉬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럴 때 물가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기·가스 및 대중교통 요금 등 공공요금을 폭탄 터뜨리듯 일거에 올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

정부도 이 점을 고려해 공공요금 인상 속도 조절을 꾀하고 있을 것이라 분석된다. 다만, 기조 변화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는 점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인식 하에 공공요금 인상 연기가 충격 분산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정부가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최악의 상황을 넘긴 뒤엔 곧 단계적 인상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납득시켜 공공요금 인상 연기가 국민들에게 그릇된 메시지로 전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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