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김기영 기자] 미국이 칩스법(CHIPS Act)에 근거해 마련한 반도체 기업 지원조건을 발표했다. 내용은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깐깐하고 냉혹했다. 지원한 돈이 단 한 푼이라도 미국의 이익에 반해 허투루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미국민들의 세금을 지원하는 것인 만큼 함부로 쓰이게 할 수 없다는 게 미 정부의 입장인 듯하다. 하지만 요구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외국 기업으로서는 투자 여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8일(현지시간)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칩스법의 이행 기준을 발표했다. 이 법에 근거해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들에게 보조금 등을 통해 지원을 하되 참여 기업들은 필요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발표된 지원조건은 총 520억 달러(약 68조3400억원) 규모의 지원금 중 시설투자 지원분 390억 달러(약 51조2600억원)에 대한 것들이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해 이와는 별개로 130억 달러 상당액을 반도체 연구개발과 인력 개발에 지원하기로 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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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부가 이날 반도체 생산 지원금 신청과 관련해 공개한 심사기준은 6가지로 요약된다. 구체적 기준 항목은 △경제 및 미 국가안보 △사업성 △재무건전성 △기술 준비성 △인력개발 △사회 공헌 등이다.

경제 및 국가안보와 관련한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미국내 반도체 공급을 강화하고 미국의 국가안보적 이익 증대에 기여해야 한다. 사업성에 대한 평가는 미국내 공장에 대한 지속적 업그레이드와 장기 운영 가능성 등을 통해 이뤄진다. 재무건전성은 예상되는 현금 흐름과 수익성 지표 등을 제공받음으로써, 기술준비성은 미국 내 환경규제를 통과할 수 있는지 등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각각 평가하게 된다. 인력개발 부문에 대한 평가는 직원들에 대한 보육서비스 제공 계획 등을 통해 이뤄진다. 끝으로 사회공헌에 대한 평가는 미국에 R&D 시설을 지원하고, 시설 건설 때 미국산 건설자재를 사용할지 여부 등을 통해 진행된다.

기술된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세부조건들 중엔 투자 기업들을 긴장시키는 요소들이 적지 않게 포함돼 있다. 이를테면 재무건전성 평가를 위해 제공해야 하는 수익성 지표 등은 경영상 기밀까지 노출시킬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다.

R&D 이니셔티브 참여 문제도 걸림돌의 하나로 지목된다. 상무부는 미국내 반도체 생산기업에 대해 미국 주도의 R&D 프로젝트 참여를 권유하고 있는데, 권유대로 했다가 반도체 생산 공정상의 주요 기술을 노출시킬 수 있다.

재무건전성 심사기준에 1억5000만 달러(약 1971억원) 이상을 지원받는 기업이 기대수익 이상의 이익을 낼 경우 그 중 일부를 미국에 반납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기준에 따르면 기대수익 이상의 이익을 낸 기업은 그 이익의 일부를 미국과 공유해야 한다.

이에 대해 상무부는 전망치를 ‘크게(significantly)’ 초과해 이익을 낼 경우에 한해 공유가 이뤄지며, 공유분은 지원금의 75%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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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부는 초과이익 공유분은 미국의 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해 쓰이게 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무부는 미국내 반도체 기업들로 하여금 지원금을 배당금 지급이나 자사주 매입 등에 사용할 수 없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무부는 또 지원금을 받은 미국내 반도체기업은 우려국에서 10년 동안 반도체 생산능력을 강화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중국을 겨냥해 미국 정부가 그동안 취해온 조치와 궤를 같이한다. 이날은 일반론을 밝히는데 그쳤지만 미국 정부는 조만간 반도체 지원금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해치는 일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가드레일 조항을 마련하기로 했다.

상무부는 미국내 반도체 기업이 중국 같은 우려국과 기술 교류를 할 경우 지원금 전액을 회수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상무부는 미국 정부가 반도체 기업의 시설투자에 지원할 보조금은 총 설비투자액의 5~15% 수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 보조금에 한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총 지원액은 설비투자액의 35% 이내일 것이라고 상무부는 덧붙였다. 추가로 필요한 재원은 민간투자를 통해 유치하라는 주문과 함께였다.

미국은 칩스법을 통해 2030년까지 미국에 대규모 로직반도체(CPU나 GPU에 쓰이는 비메모리 반도체) 클러스터를 최소 두 개 신설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인 최첨단 D램 생산시설을 여러 개 신설한다는 것도 목표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 정부가 제시한 지원 조건과 관련,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우리 기업 경영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간 미 관계 당국에 우리 측 입장을 전달해왔다”며 가드레일 조항 마련 과정에서도 미국과 협의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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