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본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반도체 산업 지원전략에 담긴 미국 우선주의가 너무 강해 현지에 투자하려는 외국 반도체 기업들로서는 계획을 재고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맞게 됐다. 최근 미 상무부가 밝힌 반도체 기업 지원조건은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쪽으로 짜여져 있었다. 현지 언론들로부터 외국 기업의 투자 유치가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깊은 고민을 떠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8일 미 상무부는 작년 8월 발효된 칩스법(CHIPS Act)을 토대로 하는 반도체 산업 보조금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성공을 위한 비전(Vision for Success’으로 명명된 이 계획의 대강은 칩스법에 따라 2022회계연도부터 5년간 527억 달러가 지원되며 그중 390억 달러가 상업용 제조시설에 할당된다는 것이었다. 상업용 제조시설이란 미국 내에 건설되는 반도체 제조공장 시설을 의미한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시설투자에 대한 지원 규모는 사업비의 5~15%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됐다. 상한은 35%로 제시됐다.

발표된 계획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보조금 지원 대상을 선정하기 위해 마련된 심사기준이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워싱턴무역관이 ‘데일리 브리핑’을 통해 전한 바에 따르면 심사기준은 6가지로 요약됐다. 6개 기준은 △경제·국가 안보 △상업성 △재정건전성 △기술역량 △노동환경 조성 △미국에 대한 기여 등이었다. 워싱턴무역관은 이중에서도 ‘기술역량’과 ‘노동환경 조성’, ‘미국에 대한 기여’ 항목에 관심이 쏠린다고 밝혔다.

우선 기술역량 부분에서는 건설사업에 대한 환경평가규정(NEPA: 국가환경정책법)의 준수 여부를 따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의 환경영향평가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현실을 지적한 것으로 분석된다.

노동환경 조성 항목에서는 1억5000만 달러 이상을 지원받을 경우 공장직원들을 위해 보육지원 계획을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무역관은 연방 노동법을 준수할 것과 근로자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조건도 함께 거론했다.

미국 사회에 대한 공헌 정도를 살펴볼 의도로 만들어진 미국 기여 항목은 투자기업들이 선뜻 이행을 약속하기 어려워 보이는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핵심은 1억5000만 달러 이상 수혜 기업이라면 초과이익의 일부를 미국 연방정부와 공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시설 건설 때 재생 에너지와 미국산 건축자재를 사용해야 한다는 부대조건도 제시돼 있었다. 워싱턴무역관은 미국 사회 기여 조건을 충족하려면 해당 기업이 연방정부에 실적 전망과 재정계획 등이 담긴 내부 문서를 제공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초과이익 환수의 근거를 마련하려면 수익을 추산할 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그 배경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제조시설이 들어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의 공장 부지. [사진 = 삼성전자 제공/연합뉴스]
삼성전자 반도체 제조시설이 들어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의 공장 부지. [사진 = 삼성전자 제공/연합뉴스]

미국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보조금 지급을 빌미 삼아 미국 사회의 현안을 해결하려는 의도까지 드러내고 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바이든 행정부가 아이 돌봄의 비용 부담을 반도체 지원금 수혜기업에 요구하려 한다고 전했다. 또 월스트리트저널은 ‘많은 부대조건(Many Strings)이 붙은 반도체 보상금’ 제하의 헤드라인 기사를 통해 상무부의 계획이 안정적 반도체 공급에 대한 미 국방부의 우려를 일부 해소해줄 것이라 전망했다.

미 정부가 밝힌 요구조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상무부는 미국 지원을 받는 기업들은 향후 10년 동안 중국 등 ‘우려국’ 내에서 반도체 설비를 증설하거나 연구 활동을 벌이는 것을 제한하겠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국가안보를 해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상무부는 조만간 이와 관련된 가드레일 조항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 조항이 한국 기업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면 중국에서 반도체를 다량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진퇴양난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두 회사가 생산하는 반도체를 포기하는 것도, 수십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의 지원을 외면하는 일도 모두 쉽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어서이다. 중국은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물량의 40%를 소화해주는 나라다. 우리의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육박한다.

결국 미국은 한국 기업들을 향해 자국과 중국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장비 등 원천기술의 우위를 활용해 반도체 생산 강국들인 한국과 대만, 소재 및 부품 부문 강자인 일본을 엮어 ‘칩4 동맹’을 결성하겠다는 구상까지 실현시키려 하고 있다. 이 역시 중국 견제의도와 무관치 않다. 실질적으로 공급망 재편을 통해 반도체패권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에 동참하려면 일정 정도 중국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 여건상 우리가 최대 교역국인 중국을 외면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을 보건대, 미국이 우리 반도체 기업들에게 던진 과제는 해당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 밖의 일이라 판단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상 통상외교 차원에서의 주요 현안으로 부상한 만큼 동맹이란 특수성을 기반 삼아 외교부와 통상 담당 부서를 축으로 대응팀을 꾸려 양국 간 대화를 벌여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기업들과의 긴밀한 협의 하에 정부의 적극 대응이 서둘러 가시화되길 기대한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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