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경제 = 정유진 기자] 국내선 비교적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 모양이지만, 매해 3월 8일은 유엔(UN)이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한 날이다.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빵(생존권)과 장미(참정권)를 달라”고 소리 높인 일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어, 이에 맞춰 기업이나 정부 기관이 으레 장미꽃을 나눠주는 행사를 열곤 한다.

혹자는 말한다. 한국 여성이 이란 여성처럼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당국에 체포되거나 의문사하는 일이 있냐고. 생존권, 참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 입학에도 직장을 갖는 것에도 제약이 없으며, 거기에 군 복무도 해당 없고 각종 여성 정책의 수혜를 입는 데다 최근엔 임신·출산까지 기피한다는 한국 여자들만큼 안전하고 자유로운 계층이 또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과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에겐 빵과 장미가 충분해서, 이제 더는 필요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사진 = 여성가족부 제공]
[사진 = 여성가족부 제공]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두 권의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증언들’은 다소 소름 돋는 상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환경오염과 전쟁으로 인해 기형아는 늘고 출생률은 급감한 미국에 ‘길리어드’라는 새 정권이 테러와 총칼을 앞세워 들어선다. 과격한 기독교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길리어드에서 ‘시녀’는 집안일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사령관(길리어드 상층부 인사)의 집에 배치돼 아이를 낳고, 낳고 나면 또 다른 사령관의 집에 옮겨가야 하는 존재다.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다리 둘 달린 자궁”이며 더 쉬운 말론 씨받이에 출산 기계다.

시녀들은 철저히 출산한 아이의 숫자로 평가되며,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기형아만 줄줄이 낳는 경우 가차 없이 ‘콜로니’(핵폐기물을 처리하는 열악한 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 길리어드에서는 여성이 글을 읽거나 직업을 가지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전부가 금지된다. 여성이 획득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는 기껏해야 가정주부, 즉 누군가의 아내에 한한다.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에게 조신하고 순종적인 아내가 되는 법, 냅킨 접는 법이나 꽃꽂이 같은 소일거리만을 가르친다.

이 흥미로운 소설이 단순 소설에 그치지 않는 특출난 지점은, 개인적으로 길리어드에서 시녀가 받는 양가적 대우에 있다고 본다. 대외적으로 ‘시녀’로 대표되는 젊은 여성들은 “명예로운 직책”을 수행하는 자로서, 아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씨를 기다리는 “꽃”, “성스러운 그릇”이라는 둥 추앙받고 보호받는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 받는 대접은 정반대다. 제품명 표기를 글씨가 아닌 그림으로 해놓은 슈퍼마켓이나 몸이 아플 때 가는 병원 정도가 그녀들에게 허락된 집 밖 행동반경이다. 그나마도 감시를 위해 시녀들끼리 2인 1조로 돌아다니는 게 원칙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거기에 가임기에 맞춰 사령관과 오로지 잉태만을 위한 성관계를 하는 이른바 ‘의례’를 치르는 게 시녀의 의무다. 물론 이를 성관계로 규정해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시녀들은 전부 총구와 가혹행위(길리어드의 세뇌에 거역하던 한 여성은 걷지도 못할 정도로 매질을 당하는 묘사가 나온다)로 목숨을 위협받아 그 자리를 지킨다. 판사, 교수 등 고학력 커리어우먼은 길리어드 내 법칙에 따르자면 일종의 범죄자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은 이름마저 남성에게 종속된다. 예를 들어 카일 사령관 집에 배정받은 시녀는 무조건 ‘오브카일’(of+사령관 이름)이라고 불린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OECD 회원국 중 꼴찌에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수치 자체는 놀라우나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전혀 놀랍지 않다. ‘가임기 여성지도’로 논란을 일으킨 정부의 행태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2016년 말 공개된 가임기 여성의 숫자를 표시한 지도로, 임신 및 출산과 양성평등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수준을 본의 아니게 까발린 셈이 됐다.

해당 지도는 빗발치는 비난 여론에 밀려 삭제됐다지만 그 여운은 참 길다. 적어도 그 지도를 기획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여성은 사람보다는 걸어 다니는 자궁에 가까웠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이디어를 입안하고 부서 내에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 부서장의 결재와 그 윗선의 용인을 거쳐 사람들에게 최종 공개됐을 가임기 여성지도는 그 어떤 단계에서도 문제시되거나 제지되지 않았다. 끝내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 수가 아니라, 사실상 한국 사회가 여성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것은 2022년 0.78명이란 전대미문의 출산율로 귀결됐다. 이 얼마나 완벽한 기승전결인지.

올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유엔여성기구 성평등센터 기념행사에서 외교부 손지애 문화협력대사는 "젊은 여성들이 일과 가정이라는 두 가지 소중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만을 고르는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우리가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정 부분 맞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괄적으론 틀린 말이다. 여기서 맞다는 건 일과 가정이 양립되기 어려운 현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대목이다.

아기 울음소리가 급속도로 잦아든 현 사태는 결코 ‘여성’이 ‘선택’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보장돼 가는 과정이 자신의 패배나 손실로 직결된다고 믿는 몰지각한 이들(이들이 꼭 남성일 필요는 없다)이야말로 공연히 남녀갈등을 부추기고 여성이 그 자체로 인격체답게 대우받는 걸 가로막는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이런저런 정책을 짜내기 이전에, 남녀가 사회구성원으로서 동일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 일명 ‘동등한 파트너’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자, 이제 묻겠다. 당신 눈에는 지금 세상 절반이 자궁으로 보이는가, 사람으로 보이는가.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