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의 여진이 국내 금융시장에도 밀려들었다.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과거의 리먼 브러더스 사태를 소환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게 들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이니 무작정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체적 분석은 SVB 파산이 과거 리먼 사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데 모아져 있다. 2008년 미국 굴지의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를 파산으로 몰아간 것은 과도하게 커진 비우량 자산이었다. 미국 내 집값 상승기를 틈타 저신용자들에게 주택담보대출을 마구 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리먼의 당시 행태는 대출을 최소화하면서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에 장기 투자하는 방식으로 자산관리를 해온 SVB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SVB 파산의 직접적 원인은 군중심리가 초래한 ‘돈 쏠림’이었다. 항해 중 돌발된 작은 소동에 승객들이 한쪽으로 쏠릴 때 배가 기울어지듯 규모 있고, 평시 안정성도 확보돼 있던 은행이 일순 중심을 잃고 넘어진 것이 SVB 사태의 진상이다. 불안감을 느낀 고객들이 일시에 맡긴 돈을 인출하는, ‘뱅크런’이 벌어지자 미국내 16위 규모의 은행도 버텨낼 수가 없었다.

[사진 = 연합뉴스 자료사진]
[사진 =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번 사태는 우리나라 금융 당국과 금융기관, 금융소비자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SVB 정도 규모의 은행이 한 순간에 파산할 수 있다면 국내 은행들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진 탓이다. SVB는 자산 규모(약 280조원) 면에서 국내의 대표적 시중은행들과 어깨를 견줄 만했었다.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지만 SVB 파산의 불똥이 미국 내 금융권 전반으로 크게 확산되지 않은 배경엔 미국 정부의 발 빠른 대처가 있었다. 대통령까지 즉각 나서서 예금 전액에 대한 지급 보증을 약속한 것이 다른 금융기관으로의 뱅크런 확산을 저지시켜주었다.

이 일로 국내에서는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졌다. 법령에 의해 금융기관별로 5000만원으로 설정된 예금자 보호 한도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키우게 된 것이다.

국내 금융소비자들은 현재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일정 규모 이하의 예금에 대해 지급 보증을 받고 있다. 보호 한도는 동법 32조 규정에 따라 시행령에 위임돼 있다. 또 동법 시행령 18조는 ‘보험금’ 지급 한도를 5000만원으로 정해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보험금은 금융기관들이 보험료를 납입하는 대신 유사시 예금보험공사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는 고객별 상환액을 의미한다.

앞선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경우 예금자 보호 한도 증액은 시행령 개정만으로 가능하다. 국회 동의 절차 없이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손질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왕에 관련 논의도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SVB 사태로 인해 관련 논의가 보다 활발히 이뤄질 환경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예금을 찾기 위해 실리콘밸리은행(SVB) 앞에 몰려든 고객들. [사진 = EPA/연합뉴스]
예금을 찾기 위해 실리콘밸리은행(SVB) 앞에 몰려든 고객들. [사진 = EPA/연합뉴스]

예금자 보호 한도의 상향조정 주장은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다. 5000만원 한도가 처음 결정된 이후 22년이 흘렀다는 점이 첫 번째 요인이다. 그간 경제 규모와 1인당 소득이 크게 늘었으니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어가며 예금자 보호 한도를 키울 필요성이 생겼다.

우리나라의 예금자 보호 한도가 비현실적으로 낮다는 것은 외국 사례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예를 들면 미국은 25만 달러(약 3억2600만원), 영국은 8만5000파운드(약 1억3500만원), 일본은 1000만엔(약 9800만원)을 보호 한도로 정해두고 있다.

폰뱅킹이나 모바일뱅킹으로 이전보다 손쉽게 예금 인출이 가능해진 탓에 ‘뱅크런’이 발생할 위험성이 더 높아졌다는 주장도 많아졌다. 소위 ‘디지털 뱅크런’으로 인해 특정 은행의 재무구조가 조금만 악화되어도 돈 쏠림에 의한 금융사 전복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주장 또한 예금자 보호 한도의 상향조정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정황상 예금자 보호 한도 재조정은 시대적 요구인 듯 보인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한도 규정은 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는 데서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마침 발생한 SVB 사태 때문에 한도 재조정은 금융소비자들의 심기 관리를 위해서도 필요해졌다.

경계해야 할 점은 일시적 분위기에 편승해 보호 한도를 지나치게 높게 잡는 일이다. 보호 한도의 무한정 인상은 여러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그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금융사와 금융 고객 모두에게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질 가능성이다. 이번에 미국 정부가 SVB 사태에 대처하면서 금융사나 고객들의 손실을 국민 세금으로 메워주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한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제시된 방법은 SVB의 자산 매각이었다.

보호 한도의 지나친 상향조정이 소수의 고액 자산가를 중점적으로 보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국내 대다수 고객이 금융기관별로 5000만원 한도에도 못 미치는 예금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한도를 무작정 높이기보다 정보에 어두운 노인 고액 등을 상대로 예금을 여러 금융기관에 분산 예치하도록 홍보를 강화하는 데 보다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예금 한도를 마냥 높일 경우 이자가 상대적으로 높은 제2 금융권으로 자금이 쏠릴 수 있다는 점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유념할 점은 예금자 보호 한도를 높이면 금융기관들이 예금보험공사에 내는 보험료가 올라가고, 그 부담이 결국 금융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관건은 보호 한도의 적정한 한계를 찾는 일일 것이다. 이는 어떤 계층을 보호하는데 초점을 맞출 지와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분명히 명심해야 할 점 하나는 예금자 보호 한도는 결코 높을수록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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